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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여운

영화 :: '추격자(The Chaser)' 후기

by 이 장르 2020.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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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무엇을 위해 그녀를 죽였는가. 그리고 또 다른 그는 왜 그녀를 찾기 위해 몸부림쳤는가.

 

 

모순이다. 일을 나가라며 아픈 사람에게 소리쳐대던 사람이, 그 여자가 없어졌다고 온 동네방네 찾았다니 다니 말이다. 분실물 찾듯, 그저 돈벌이 수단 중 하나 없어졌기에 찾아오기 위함이었나.

 

 

정의를 실현하는듯하지만 알고 보면 그저 자신을 농락하던 살인자에 대한 분노에 대한 앙갚음의 행동일 뿐이었다. 정의 따위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인간은 더 이상 정의라는 허황된 이름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정의가 없어도 세상은 돌아간다. 정의의 탈을 쓴 자들도 각자의 이익을 위해 움직인다. 보는 내내 답답함을 감출 수 없었던 이유는 아마도 영화가 끝난 다음 스크린에서 시선을 떼어낸다 해도 뉴스 속에서, 혹은 바로 옆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무의식 중에 인지하고 있기에 그런 것이 아닐까.

 

 

살아있다. 아직 내 주변에, 같은 하늘 아래 나와 같은 언어를 쓰며 살아있다. 누구를 믿을 수 있을까. 이제는 너와 내가 서로를 믿을 수 있을까.

 

 

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가 보자. 언제 드러 날지 모르는 공포를 하루에도 몇 번 삼키고 살아가는 자들은 누구인가. 여기서 땅에 묻힌사람은 누구인가. 망치로 맞아 죽은 사람은 누구인가. 칼에 찔려 죽은 사람은 누구인가. 극한의 배고픔에 사체를 뒤적여야만 했던 것은 누구인가.

 

 

일종의 클리셰라고들 한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뚜렷하게 나뉘어있는 것이 모순이라고 한다. 모순일 수도 있겠지, 모든 피해자가 어느 한 부류는 아니기에. 하지만 대부분의 피해자는 적어도 하나 이상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에 동의하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가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일정 부분 이상 공감을 할 것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이야기들이 여태까지 많은 사람들의 몰입을 얻어낼 수 있는 것이니까. 일말의 알량한 자존심, 그리고 타인의 고통. 무엇을 더 우선순위에 두어야 되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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