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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09. 월간 글노트 창밖에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끊임없이 내리던 비가 지긋지긋하게 느껴졌던 게 아직 두세 달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선선한 공기가 반갑기까지 한 걸 보니 인간이 이렇게나 변덕스러운 존재다. 생각해 보면 사계절을 여러 번 지나쳤음에도 이전의 온도를 금세 잊어버리니. ​ 오랜만에 느껴지는 시원함 틈새로 들어오는 습한 공기가 이상하리만치 몽글몽글하게 느껴지는 날이다. 익숙한 것이 익숙해지지 않을 때 비로소 그것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다는 게 모순적이긴 하지만, 그렇기에 우리는 네 가지의 계절을 설레는 기분으로 맞이할 수 있나 보다. ​ 스쳐 지나가듯 바뀌는 공기를 타고선 우리도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다. 원하든 원치 않듯 그건 중요치 않은 듯. 세상으로부터 그 틈새에 끼워져있는 슬픔을 외면하는 거라고 배워.. 2021. 10. 15.
기다리다 지치는 건 약속이 아니었다 어느 가을날, 벤치에 앉아 차가워진 바람을 스치며 차분해지고 있었다. 여유를 즐기는 방법을 몰라 일단 보이는 벤치에 덥석 앉았고, 언제나 이어폰으로 채워져있던 귀를 통해 바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수없이 많은 순간 바람을 거쳐갔음에도 이 소리가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 늘 바라왔던 순간이 이렇게나 쉽게 이루어지니 때아닌 허망함이 물밀듯 밀려왔다. 그렇게나 갈망했던 것이 이렇게나 쉽게 얻어질 일인가. 스스로에 대한 약속이라며 옥죄었던 나날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어쩌면 여유에 대한 환상에 스스로를 가둬버린 것이 아닐까 싶기도. ​ 기다리다 지치는 건 약속이 아니었다. 그저 다른 사람들처럼 버스정류장에 붙어있을법한 막연한 문장만 믿고 기약 없는 기다림을 시작했더랬다. .. 2021. 10. 14.
삶의 목적이 아니라 삶이 목적이었다 칙칙한 하늘이 감흥 없이 느껴지던 어느 날. 발끝으로 느껴지던 겨울은 신발 안까지 파고들었다. 얼어붙을세라 발가락을 꿈틀거리며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고 있었다. 아래로 떨어져 파랗게 질려버린 신호등 속 사람은 어딜 가려 저리 급하게 몸을 틀었는지. ​ 여전히 겨울이다. 이유 모를 추위가 우리 삶 속에 파고들어오는, 바로 그 겨울이다. 매번 어김없이 찾아오는 겨울은 왜 이리 부지런한지. 한 번쯤은 그냥 지나칠 법도 한데. 가끔은 겨울이 미워지곤한다. 좋은 경험만 하며 살아갈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서도 나는 여전히 삶이 낯설게만 느껴져 이 추위가 언제쯤 끝이 날 지 어디까지 움츠려들어야 할지 아득하게 다가온다. ​ 삶의 목적이 아니라 삶이 목적이었다. 따뜻함을 찾아내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따뜻한 사람.. 2021. 10. 12.
유럽 2-9. 스위스 루체른 Switzerland Luzern🇨🇭 걸어가다 보니 조그마한 가게에 두세 명 정도의 직원이 케밥을 만들어주는 가게가 보였다. 배고프진 않았지만 맛은 보고 싶다는 모순적인 마음에 케밥 하나를 주문했다. 그렇게 받아 든 케밥은 두 손으로 들어야 할 정도로 커다랬다. 케밥을 잘라 하나씩 집어 들고선 우리는 그렇게 루체른을 누볐다. 팔뚝만 한 케밥을 받아 들고선 한입 베어 물었다. 한두 번 꼭꼭 씹어 행복해지고있을무렵, 머리 위로 비가 한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한 손에 케밥을 들고, 다른 한 손은 쫙 펼쳐 머리 위에 올려두고선 비를 피하기 위해 뛰기 시작했고, 어느 아기자기한 물건들을 파는 가게 앞에 다다랐다. 우리는 가게 앞 천막 아래에 서서 고요한 빗소리로 가득 찬 루체른을 감상했다. 눈앞에 펼쳐진 로이스 강의 풍경은 여전히 빗속.. 2021. 10. 8.
감정이란 쓸모없는 것일까 인간에게 감정이란 요소는 인간에게 다양한 것을 제공하는 반면, 하지만 일관성을 유지하는 데에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 감정이란 무언가의 효율을 올리는 데에 방해가 되는 요소로 인식하고 있으며, 그것을 최소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시도를 하게 된다는 말이다. ​ 감정은 우리가 어떠한 일을 진행하는 데에 일관성 있게 임하는 데에 방해가 될 수 있는 요소를 지닌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가 어떠한 일을 시작하기까지는 감정이라는 요소가 꽤 큰 비중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인간이 효율만을 최우선으로 여긴다면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을 것이며, 과거의 관습에 대해 비판 없이 수용하지 않을까 싶다. ​ 어쩌면 효율을 따지기에 앞서, 새로운 것에 대한 설렘 등의 감정이 우리가 새로운 도전을 하도록 이끌어낼.. 2021. 10. 6.
영화 :: '붉은 거북(The Red Turtle)' 후기 ​ ​ ​ 신기했다. 처음 보는 무언가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당신은 나의 궁금증을 깨워내기에 충분했다. 당신도 나를 궁금해할까. ​ 당신의 탈출을 막은 것이 아니다. 단지 당신과 대화를 하고 싶을 뿐이었다. 당신에겐 섬세하게 움직일 수 있는 열 개의 손가락이 있겠지만, 나는 뭉퉁그려진 두 개의 팔뿐이다. 바다로 올라온 당신이 반가웠다. 나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신호를 보냈을 뿐인데. 그렇게 흩어진 당신의 흔적을 타고 당신은 모래밭으로 다시 돌아갔다. ​ 당신의 모래밭은 나에게 너무나 어려워, 나의 바다로 또다시 와주길 기다렸다. 간간이 떠오르던 당신의 공간은 나의 노크 몇 번에 무참히 흩어져 버렸다.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그곳으로. 당신이 있는 그 모래밭으로. ​ 뭉툭한 나의 두 팔로 모래밭.. 2021. 10. 5.
유럽 2-8. 스위스 루체른 Switzerland Luzern🇨🇭 부지런한 룸메들 덕에 6시부터 울리는 알람을 들으며, 눈틈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빛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방 여기저기서 분주하게 준비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나도 주섬주섬 정신을 챙겨 몸을 일으켰다. 우리는 1층 로비 인포메이션 왼쪽으로 펼쳐져 있는 테이블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조식은 간단한 뷔페식으로 되어있었고, 우리는 총총거리며 접시를 들고 줄을 섰다. ​ 가장 처음 눈에 띄었던 건 된장국이었다. 이 된장국의 밍밍함 대해서는 스위스로 이동하는 동안 이미 대장들에게 들었던 터라 다들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우리는 한식 대신 빵과 베이컨, 샐러드 조금을 접시에 담 아들 고선 어제 혜와 산책했던 강이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숙소의 1층은 풍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벽면을 통유리로 해둔 .. 2021. 10. 1.
쉬는 것이 죄가 되는 사회 우리는 잘 쉬고 있을까. 어릴 때부터 무엇이든지 열심히 해야 한다는 말을 들어온 우리는 쉬는 것 또한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강요받아왔다. 쉬는 것에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열심히라는 말과 쉰다는 말의 조합이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쉬는 것조차 무엇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리의 모습이, 아무것도 안 하는 것에서 죄책감을 느끼는 우리가 과연 잘 살고 있는 걸까. ​ 최근 정신질환을 호소하는 사람이 급격하게 늘어가고 있다. 이는 분명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인간이 살아가기에 좋은 환경은 아니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환경 속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사람들이 있겠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이 이러한 고통 속에 잠식당하고 있다. ​ 여유가 없다. 나와 내가 대화를 나눌만한.. 2021. 9. 29.
영화 :: '무드 인디고(Mood Indigo)' 후기 우리의 사랑은 어떤 향일까. 그리고 우리는 이 모습 그대로 사랑할 수 있을까. 인생의 한순간에서 우연히 만나 서로에게 빠져, 마치 우리의 사랑을 위해 세상이 존재하듯 그렇게 사랑했다. 우리의 사랑은 나에게 그런 존재였다. 이 순간 영원히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을듯했다. 딱 지금, 이렇게. 하지만 세상은 그리 녹록지 않더라. 우리가 함께하기로 결심했던, 우리가 함께 피워나갈 미래를 그리던 그 순간부터 당신은 시들어갔다. 모든 것이 나 때문일까. 내 욕심에, 내가 당신 곁에 있어서일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당신을 지켜내기 위해 내 모든 것을 내놓는 것뿐. 괜찮아, 당신은 내 전부니까. 그렇게 당신은 떠나갔다. 야속하다기보단 당신과 함께할 수 있던 시간을 조금 더 늘리지 못했다.. 2021. 9. 28.
영화 :: '쉰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 후기 홀로코스트, 과거라는 이름으로 묻어두기엔 그 흔적이 여전히 고통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누군가의 목숨이 한낱 종이 장 보다 하찮게 여겨져 쉽게 짓밟히던 시대를 살아가지 않은 것은 행운이라 할 수 있겠다만, 그렇다면 그 시대를 살아갔던 사람들의 희생은 무엇이 되겠는가. 보상할 수도, 보상받을 수도 없는 시간. 인간이길 포기했던 사람들 속에서 스스로 인간임을 잊지 않았던 몇몇 사람들. 그렇게 자신의 목숨을 걸어 전시해둔 채로 광기만 채 남아있던 시선을 끌어냈다. 그리고선 음지로, 더 음지로, 가능한 한 더 보이지 않는 곳으로. 한 영혼이라도 더 붙잡기 위해 소중히 여겼던 모든 것들을 내놓았다. 고마워하는 마음보다 당신들을 고통으로부터, 최소한의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버텨내는 것이 나의 목표일뿐이다.. 2021. 9. 27.
한참 기다린 가을이 오긴 했다 집 밖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느껴지는 차가운 공기에, 아 가을이 왔구나. 여름의 흔적처럼 여전히 드러나있는 살결에 바람이 스치자 살짝 움츠러들었다. 그렇게나 지루했던 여름이, 정말 지나가는구나. 옷장에서 짙은 오렌지색 카디건을 집어 들었다. 아직까지 낮에는 조금 더운 감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가을인걸. ​ 가을의 카디건을 사랑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카디건을 입을 수 있는 이 계절을 사랑한다. 선선함과 살짝 더운 그 공기 사이를 오가는, 그 느낌을 사랑한다. 그동안 텁텁했던 그 공기들을 환기시키는듯한, 그 계절을 사랑한다. ​ 얼마 후면 또 가을이 그리워질 테지. 차가운 공기가 옷 틈새로 들어올세라, 옷깃을 여미기 바쁠 테지. 계절의 내음을 음미할 수 있는 여유는 차가운 공기 속으로 사라지겠지. .. 2021. 9. 23.
유토피아는 없다 인간이 이상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은 어쩌면 본능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슬프게도, 우리의 환상은 대부분 허상에서 끝날 때가 많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유토피아처럼 묘사하는 북유럽 국가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살기 좋은 곳일까. ​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북유럽 사회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폐쇄적이다. 그들은 외부인들을 환영하지 않는다. 북유럽 국가에서 혼혈인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사실에서 이들의 폐쇄성을 엿볼 수 있다. 그들은 암묵적으로 규정되고 있는 북유럽이의 외모를 지닌 백인을 제외한 사람들에게 인종차별적 발언을 서슴없이 한다.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여러 인종이 함께 살아가고 있어 일부를 제외하고는 인종차별에 대해 조심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북유럽에선 누군가가 어떠한 발언 혹은 행위에 대.. 2021. 9.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