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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으로서의 기록/Project 2023

🇦🇺또 일벌이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 2023 전시 프로젝트 프롤로그

by 이 장르 2023.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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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오기 전까지 딱 1년만 타지에서 사는 경험을 하고 돌아와 한국에서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해야겠다 생각했더랬지. 하지만 인생이 뭐 생각대로 흘러가주던가. 나는 내가 독립적인 사람이라 생각했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나 보다. 이곳에서 알게 된, 사실 안지 얼마 되지 않은 친구들이 세컨비자를 따기로 마음먹었다는 이야기를 듣고선 굳게 다짐했던 나의 마음이 일렁여왔다. 이렇게나 쉽사리 타인의 파동에 출렁이던 사람이었나.

사실 나는 이들의 말보다 그저 내가 이곳에서 머무는 1년이란 시간이 아쉬웠는지도 모른다. 나와 함께 세컨비자를 고민하고있는 D가 나에게 물어볼 때마다, 이곳에서 1년 더 머물러야 되는 이유를 찾고 있노라고 대답했더랬지. 그 이유를 너무나도 찾고 싶었지만 2, 3년 더 머문다 해도 호스피탈리티에서 벗어나지 못할듯했다. 좀 더 나은 삶을 산다 해봤자 오피스 잡일 텐데 그러면 한국에서의 삶과 다른 것이 무엇일까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우리 아파트 건물의 작은 카페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퇴근을 하든, 친구를 만나고 집에 오든 항상 그 카페 앞을 지나야 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시선이 그쪽으로 향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전시들이 내 맘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아 나도 전시하고 싶다.'라는 생각만 하고 선 몇 개월이 흘렀더랬다.

의미 있는 걸 찾아야 한다는 강박에 고민을 하다가 세컨비자 연장하러 공장에 가기 전에 전시를 해보자는 결심을 했다. 퍼스트 비자 기간을 살아가는 동안 전시라는 이벤트를 남기면 좀 멋져 보이지 않는가. 기획에는 자신 있긴 하지만 그림을 잘 그리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할 수 있는 퍼포먼스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난 무얼 전시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만 수없이 되뇌며 그렇게 또 시간이 흘러갔다.

아무래도 전시다 보니 그림이나 퍼포먼스를 할 수 있는 사람을 주변에서 섭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최근에 알게 된 한국인 Y를 섭외하려 했으나, Y는 호주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일자리 문제, 집 문제로 맘고생을 많이 하고 있는 상태였다. 돈 문제로 고민을 많이 하고 있는 Y에게 시간을 내어 이 전시를 함께 준비하자는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아 Y와의 협업은 다음 기회로 미뤄두기로 했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다음 타깃은 T. 그림에 재능이 있으나 본인의 재능이 어느 정도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듯했다. 그렇기에 T의 재능은 늘 작은 포스트잇 한 장에서 벗어나지 못했더랬다. 이곳까지 와서 외국인이랑 협업해 보는 것도 재밌는 일이겠다 싶어 T에게 제안을 해봐야겠다 싶었다. 물론 그렇게 마음만 먹고 선 구상조차 해두지 않은 채로 또 몇 주가 흘러갔다.

그러던 중에 T와 함께 마감을 마치고 집에 가는 길, T가 곧 이곳을 그만둔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닌가. 새로운 일을 구했기 때문에 이곳을 몇 주내에 떠날 예정이라 했다.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날 집에 도착해 새벽 4시까지 전시회에 대한 대략적인 구상을 모두 마쳤더랬다. 몇 달간 고민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이 짧은 시간에 이렇게 디테일을 정할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뿐이었다. 역시 궁지에 몰려야 최대 효율을 내는구나. 앞으론 더 일찍 준비해야지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나였다.

내 영어실력이 좋진 못하지만 적어도 말로 내가 어떤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있는지에 대해선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T에게 협업 제안을 하기 위해 영문으로 기획서를 만들기 시작했다. 사실 프로젝트를 진행함에 있어서 기본적인 기획서 하나는 만들어둬야 하기 때문에 겸사겸사 만든 거지 뭐. 그렇게 만든 기획서가 지인의 손을 거쳐 다듬어졌다.

사실 다 완성해두고선 연타가 와 파일을 전송할까 말까 한 시간 남짓을 고민했더랬다. 이게 맞을까, 내가 T를 믿어도 되는 걸까. 그리고 매일 터져나갈 내 멘탈과 이런 프로젝트가 처음일 T의 멘탈까지 핸들링할 수 있을까에 대한 두려움이 나를 멈칫하게 만들었다. 여태 프로젝트를 하면서 한 번도 거절을 당해보지 않아서 그런가. T의 대답이 어떨지에 대해, 그리고 T가 혹시 거절을 한다면 전시의 방향이 조금 수정되어야 할 텐데 이걸 또 언제 하고 있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뭐 어쩌겠는가. 일단 부딪혀보기로 했다. 며칠 후에 T와 시프트가 겹치니 만약 답장이 당장 오지 않더라도 본인이 불편해서 일주일 내로 답변 주겠지. 그렇게 생각 후 파일을 보내고 나니 뭔가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이제 내 손을 떠났구나. 기다릴 일만 남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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