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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여운

영화 ::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千と千尋の神隠し , The Spiriting Away Of Sen And Chihiro)' 후기

by 이 장르 2020.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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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열 번넘게 돌려봤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엄마가 일본어를 배운다고,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에서 뿜어져 나오는 잔잔함이 좋다며, 우리 집에 있던 몇 되지 않은 DVD 중 하나였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대부분의 장면이 머릿속에 있을 정도로 익숙한 영화지만 과제를 위해선 다시 보는 것이 맞다는 생각에, 침대에 고정해 둔 핸드폰 거치대에 핸드폰을 고정시켜두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그저 주인공을 괴롭혔던 유바바와 가오나시를 물리치기를 바랐던 초등학생과 여러 인물에 감정이입이 되던 20대 후반의 감상은 분명히 다를 테니.

 

역시나 익숙하다. 하지만 분명, 어릴 때 봤던 영상도 일본어에 자막이 들어가 있었는데 오늘은 유난히 일본어가 낯설다. 세월의 힘일까, 기억의 변형일까.

 

 

 

 

- 이름의 의도

 

‘치히로’가 ‘센’이라는 이름으로 살게 된, 유바바가 의도에는, 이름 그 자체만 말하는 것이 아니었으리라.

 

이름이 스스로를 지칭하는 고유명사인 만큼 그 안에는 나의 모든 특징들이 함축되어 있다. 시간이 지나고 나 스스로가 고유명사로 되어갈 때 즈음, 가끔씩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영화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아웃백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절,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기 전에 닉네임을 반드시 정해야 하는데, 나에게 내가 또 다른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이 낯부끄러워 머뭇거리다 결국 치킨 메뉴의 약어를 닉네임으로 쓰게 됐다. ‘앨리스‘. 어쩌다 보니 그 이름으로 3년을 근무하게 되었다.

 

일을 하면서 내 이름보다 ‘앨리스’로 불리는 경우가 더 많았다. 나는 일주일, 그 168시간 중 절반 이상을 그곳에서 썼고, 자연스레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일을 하지 않을 때조차 함께 보내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내 이름이, 때로는 낯설어졌고 나답게 살아가는 것이 아닌, ‘앨리스’ 답게 살아가고 있었다.

 

이 이후 함께 일하던 사람들과 만날 때에도, 그들에게 나는 내 이름보다 ’ 앨리스‘라는 이름이 더 익숙한듯했다. 아직까지도. 사실상 3년보다 더 긴 세월을 두 가지 이름으로 살아온 셈이 되어버렸다.

 

물론 모든 것에는 정답이 없듯, 이것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만약 내가, 가까운 미래에 글을 쓰는 일을 하게 된다고 한다면, 또 다른 이름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일상을 살아가는 나와 분리된, 또 다른 내가 되어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도록 말이다. 부모님이 키워주신 내가 아닌,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나로서.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는 우리의 선택이든 아니든 ’ 하쿠‘로 살아가게 되지만, 스스로 ‘니 기하 야미 코하쿠누시’ 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 인간의 욕심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악하다는 느낌을 늘 받곤 한다. 선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악한 것이 조금 더 우세하다는 말이다. 살아가면서, 세상이 사람들을 악하게 만든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 가오나시. 가오나시를 통해 최대한 많은 사금을 취하려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그토록 원하던 사금을 거절하는 센. 물질로도 얻을 수 없는 것을 더 갈망하는 가오나시.

 

”걱정 마, 쟤는 바깥으로 나오면 힘이 없어져. “

 

사람들의 욕심이 가득했던 대중탕을 벗어나자 힘을 잃은 가오나시. 센, 아니 치히로는 그것을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보이는 것에 대한 욕심을 꾸준히 이어나갈 경우, 어느 날 그것이 나를 잡아먹게 될지도 모른다. 내가 낳은 욕심이 나를 잡아먹는 일이 없길 바라며, 부디.

 

 

 

 

 

- 유바바의 모순

 

타인에게는 한없이 지독하지만 자신의 아들 ‘보’에게는 한없이 따뜻한 엄마로 남고 싶어 하는 유바바.

 

이전에 이 영화를 봤을 때, 그러니까 초등학생이었던 나에게는, 그저 ‘당연한’ 장면이라 별생각 없이 넘겼더랬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어른이 되기 위해 노력했던 시간들이 쌓이니 유바바를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나 보다.

 

바깥은 세균이 많아 더럽기에 병에 걸리기 쉽다고 하는 보. 아마 엄마 유바바의 걱정에서 나온 말이었겠지. 좋은 것만 접하길 바라는 유바바의 말은 모순적이게도 보의 세상을 좁혀버렸다. 제니바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보’는 사람들이 흔히 ‘더럽다 ‘는 쥐가 되었고, 그렇기에 더 큰 세상을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 새가 알에서 깨어 나오듯, 보는 유바바의 품에서 나오게 된 것이다.

 

 

 

- 마주해보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

 

유바바의 사람들이 그녀의 언니 제니바를 묘사할 때, ’ 못된 ‘ 또는 ’ 마녀‘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유바바에 대한 두려움이 쌍둥이 언니 제니바에게까지 넘어갔고, 실제로 만난 적이 없으니 두려움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졌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영화에서 본 제니바는 그 어떤 인물보다 인간적이었으며, 편견 없이 따뜻했다. 가오나시가 요괴라는 것, 유바바의 구역에 있을 때 어떤 행동을 했는지 알면서도 포용했다.

 

또한 마법으로 해결하기보다 시간과 정성을 들이는 것, 그것의 가치를 알고 있었다.

 

제니바는 유바바와 같은 날 같은 모습으로 태어났지만, 둘은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 것이다.

 

두려움이 만연한 삶이지만, 어쩌면 이 두려움이 거짓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막상 실제로 마주하면 별거 아닐 때가, 따뜻해질 때가 있다는 것.

 

두려움은 편견의 다른 이름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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