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의 여운

영화 :: '레이디 버드(Lady Bird)' 후기

by 이 장르 2020. 5. 5.
728x90
반응형

나의 새크라멘토, 그리고 크리스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 년에 한편 볼까 말까 한 영화를, 수업 때문에 단숨에 해치우고 있는 요즘. ‘레이디버드’라는 영화가 넷플릭스에서 10일까지만 볼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일단 재생 버튼을 눌렀다.

 

‘레이디버드’는 주인공 스스로가 지은 예명.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지만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레이디버드’로 소개한다.

마음에 들지 않는 자신의 모습과 모진 말만 퍼붓는 엄마, 그리고 가난. 이 모든 것들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마음이 그렇게 표출된 것이 아닐까.

모진 말을 쉼 없이 퍼부어대는 엄마를 보며, 주인공이 어쩌면 나와 닮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 또한 벗어나고 싶었다. 사춘기도 아닌데 가끔 느끼는, 엄마와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나를 꾸준히 옥죄어온다.

50대, 여태 정신없이 지나왔던 자신의 삶이 문득 억울해지는 나이. 누군가를 위해 살다 보니 자신의 삶이 남아있지 않다고 느껴지는 나이. 그래서인지 이전에 안 하던 말들을 꽤 쏟아내곤 한다.

그런 생각도 했었다. 아빠가 있었다면, 집에서의 모든 것이 억울하게만 느껴졌을까. 세상에서 말하는, 내 편이라는 사람들이 가장 가까이 있는 공간에서 모순적이게도 한 때 나는 지극히 외로웠다.

그러다 문득, 지금 우리 부모의 세대는 시대가 변함에 따라 아이들에게 좋은 부모가 되려고 어설프게 노력하고 있지만, 자식에 대한 지지나 사랑을 온전히 받아본 적이 없기에. 매체에서 보고들은 좋은 부모의 모습은 따라 하고 있긴 하지만, 그들 부모의 모습이 불쑥 나올 것이라는 것. 하지만 그들은 노력하고 있으며 그러한 노력으로 인해 세상은 분명 더 따뜻해질 것이라고.

맞다. 주인공의 엄마는 우리 엄마처럼 이해할 수 없는 곳에서 지적하고 화를 내 곤했다. 나에게만 유독 그러다 보니 가끔은 내가 엄마 딸이 맞나, 내가 태어남으로써 엄마의 발목을 잡은 거였나 싶기도 했다. 크리스틴이 그렇게 생각했던 것처럼.

분명 노력하고 있었다. 단지 내가 원하는 형태가 아니었기에. 나 또한 완벽한 딸이 아니며, 심지어 기대에 부응하려는 노력조차 안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혼자 힘으로 원하던 대학에 들어간 레이디버드는, 누군가가 이름을 묻는 것에 크리스틴이란 이름으로 자신을 칭한다.

그렇게 크리스틴은 부모를, 자신을 이해하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한다.

모든 것은 자신과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부정하는 것에 익숙해지다 보면, 내 삶도 나 자신에게 부정당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요즘.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