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방인으로서의 기록/2023 🇦🇺

🇦🇺 바꿀 수 있는 것이 없을 것 같을 때

by 이 장르 2023. 2. 17.
728x90
반응형

멜버른에서 보는 것이 마지막인 것처럼 여겼던 과 달리 우린 의외로 꽤 자주 안부를 묻고 지내고 있다. 어제는 예라에게 오랜만에 전화가 왔다. 가장 잘 지내고 있을 줄 알았던 예라조차 새로 옮긴 농장 작물들이 상태가 좋지 않아 2주 동안 일을 못하고 있다더라.

이쪽 농장만 그런 게 아니라 퍼스 쪽도, 번다버그쪽도 시프트를 못 받고 있는 건 마찬가지라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농장 중 일부는 문을 닫기도 했단다. 문득 통장에 11달러밖에 없어 50분 거리에 있던 마켓까지 가서 우유밖에 사 오지 못했다며 서럽단 말을 장난스레 했던 진의 말을 되새겨보게 됐다. 아, 그게 힘들다는 의미였구나. 진은 힘들어도 힘들다는 표현을 안 하는 성격이라 걱정된다던 다혜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다들 일을 구해 세컨비자 조건을 채우고 있겠거니 싶었지만 어디든 쉬운 건 없나 보다. 그럼에도 그동안 어떻게 다들 세컨비자를 덥석덥석 따내 워홀 생활을 마무리 지어온 건지. 생각해 보면 누구나 한다는 이유로 시작한 것들은 대부분 수월하게 얻어지는 게 아니더라. 당연하다는 이름하에 쉽지 않은 것들을 당연스럽게 견뎌낸 것뿐이었다.

상황을 바꿀 순 없었다. 노력으로도 막을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어쩌면 지금 우리의 상황들이 그렇지 않나 싶었다. 당연히 농장으로, 케언즈로 오면 일자리를 구해 세컨비자를 얻기 위한 조건을 채워나갈 수 있을 줄 알았다. 우리는 어쩌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 다른 사람들이 노력으로 얻은 것들을, 그들의 노력을 쉽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한인 잡은 하지 않겠다던 나는, 한인 잡이라도 시작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왔다. 그렇게 센트럴에서 유일하게 레쥬메를 건네지 않았던 스시집에 레쥬메를 넣기 위해 발길을 돌리기로 했다. 어색하게 쭈뼛거리며 인사를 건네고선 직원 구니하냐고 묻자, 마침 구한다며 레쥬메를 달라 하더라. 레쥬메를 건네받은 그 직원은 내 레쥬메를 유심히 보더니 '한국 분이세요?'라고 물어보시더라. 한국인이라 하니, 매니저님이 지금 면접 중이니 오신 김에 면접 보고 가시라 하더라. 면접 끝나면 연락 주신다 해서 센트럴 좀 돌아다니려 했는데 마침 그 타이밍에 인터뷰가 끝났고, 이분이 매니저님 불러서 내 레쥬메를 전해주셨다. 그렇게 우연히 나는 그곳에서 인터뷰까지 보게 됐다.

그동안 그렇게 바라왔던 인터뷰가 이렇게 쉽게 잡힐 일인가. 매니저라는 분도 인터뷰 보고 갈 수 있냐 하길래 당연히 된다며 인터뷰를 보게 됐다. 인터뷰 내내 분위기는 좋았다. 매니저님도 시원시원하신 성격일듯했고, 시급도 나쁘지 않았다. 2주간 트레이닝 기간이 있다지만 그조차 제시한 시급을 모두 준다 하니 말이다. 세컨 비자를 따러 왔냐 물으시더니, 3월에 세컨비자조건을 채우고 나갈 친구가 있다며 그 친구가 조건을 채우고 나면 풀타임으로 일할 수 있을 거라고도 했다. 모든 조건이 좋았다. 심지어 위치도 센트럴이니 집도 가까웠고, 퇴근하고 편의시설을 들르기에도 좋았다.

하지만 장담할 수 없었다. 자신만만하던 나는 이곳에서 내가 오만했구나란 깨달음을 얻었고, 일을 할 수 있다면 지금은 그저 감사할 뿐이다. 다음날에도 면접 일정이 있어 내일 연락을 주시겠다던 말을 듣고 그곳에서 나왔다. 그리고 오늘, 스시집에서 연락을 받았고 트레이닝 시프트도 받았다.

어쩌면 이곳에서는 좋은 한국인들을 만나 함께 일하며 추억을 쌓는 경험을 하기 위함인지도 모른다. 그동안 멜번에서는 오지 오너와 외국인 코워커들과 함께 일하면서 그들의 따뜻함을 경험했으니 말이다. 그저 지나칠 수 있었던 내 레쥬메를 매니저님께 직접 전달해 주던 그 직원도 한국인인 내가 낯선 케언즈에 와서 고생하고 있다는 걸 같은 한국인으로서 잘 알고 있었기에 도와주셨던 게 아닐까 싶다. 

감사함의 연속이다. 낯선 이를 위해 조금 더 움직인다는 것이 귀찮음을 감수해야 한다는 걸 알기에 이들의 호의가 따뜻할 뿐이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따뜻한 사람일까, 따뜻할 수 있을까. 호주에서 받은 따뜻함을 타인에게 흘려보낼 수 있을까.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