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누군가를 심판할 수 있는 존재로 설 수 있을까.
성서의 7가지 죄악. ‘식탐, 탐욕, 나태, 분노, 교만, 욕정, 시기‘. 추상적으로 정의된 죄악의 기준은 무엇이며, 누가 정하는가. 누군가를 심판하는 인간은 이러한 죄악들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울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선배님 다시 잘 생각해보세요. 선배님은 사람들의 무관심이 문제라고 하셨죠. 그러면 저도 무관심한 거겠네요. 그건 말이 안 돼요. 왜인지 아세요? 이유는...”
“자네는 관심이 있나?”
“그럼요”
“자네는 바꿔보고 싶은가?”
“어쨌든 선배님은 아까 한 얘기 때문에 은퇴하시는 게 아니에요. 제가 볼 땐 그래요. 은퇴하기 때문에 그렇게 믿고 싶은 것뿐이에요. 제가 선배님이 옳다고 동의하기를 원하죠? 모두 엉망이라고 하면서요. 멀리 떠나서 살아야 한다고 말이에요. 하지만 저는 동의안 해요. 안 할 거예요. 절대로요.”
인간은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믿는가, 혹은 끌려가는 대로 믿으려 하는가. 결국 자신이, 자신의 상황이 옳다는 것을 증명해내고 싶은 인간의 욕구가 이끌어낸 결과가 아닐까 싶다. 공들여왔던 자신의 인생이 가라앉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버린다면, 그동안 들이부었던 노력을 비롯한 자신의 모든 것을 부정당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상황이 사람을 만든다. 사람은 상황에 자신을 구겨 넣으려고 한다는 말이다. 자신이 구겨지는지도 인지하지 못한 채. 결국 그렇게, 서서히 죽어간다. 결국 남은 것은 걸어 다니는 껍데기뿐이겠지.
웬만해서는 사람들이 더 이상 말을 들어주지 않아. 극단적인 방법을 써야 해.
그래야 호들갑을 떨며 주의를 기울이지.
이런 추한 자들을 과연 죄 없는 무고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나?
인간의 본능적으로 자극적인 것을 찾게 된다. 또한 자극은 신선한 것으로부터 오곤 한다. 유감스럽게도 세상에 자신이 느낀 옮은 말들을 해주는 사람들은 넘쳐나며, 비슷한 내용을 반복적으로 접하게 됨으로써 우리에게 자극이 되기엔 이미 사소해져 버렸을 뿐이다.
자극을 최대치로 올려 무고하지 않은 인간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겠다는 범인은, 결국 그가 원하는 대로 해냈다. 자극에 성공한 것이다. 사소한 자극이 모여 사람들이 쉽게 지나치지 못할 자극, 혹은 그것을 넘어선 공포를 만들어냈다. 표면적으로 자극의 출처는 범인이겠지만, 자극을 만들어낸 것은 범인 혼자만일까.
엄청난 죄악이 온 거리마다 가정마다 뿌리를 내리고 있어. 흔하다는 이유로
그걸 눈감아주고 있고. 일상이 돼버렸지. 하지만 더 이상은 안 돼. 본보기가 필요해.
모든 사람들이 내가 한 일을 기억하며 연구하고 교훈으로 삼게 될 거야.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아직 바꿀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있긴 한 것일까. 아니면 너무 늦어 버린 걸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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