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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여운

영화 :: '송곳니(Kynodontas, Dogtooth)' 후기

by 이 장르 2020.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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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무서워서, 나가면 안 돼.

두려움이란 누군가를 조종하기 위해서 이용할만한 인간의 감정이다. 피를 흘려야 떠날 수 있는 곳, 죽어서야 떠날 수 있었던 아름다운 감옥. 빛 좋은, 오직 빛만 좋은 감옥. 그리고 그곳에서 나오지 못하는 사람과 그 감옥을 이용하는 사람, 그리고 감옥의 절대자. 그들의 세상을 최소화한다면, 결국엔 자발적으로 폭력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부모는 자신의 자식들이 세상을 알지 못하길 바라는듯했다. 그것은 보호가 아닌 기형적인 억압의 형태였다. 그들은 자신의 아이들에게 다양한 규칙과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제시하며 세상과 천천히 단절시켜갔다. 우리가 듣기엔 터무니없는 이야기도, 절대자인 아버지의 입을 통해 나온다면 그들에게 그것은 곧 세상의 이치였다. 그러면 되는 줄 알았고, 그래도 되는 줄 알았을 것이다. 결국에는 그들의 규칙이 언어의 사회적 기능을 제거해버렸다.

자식이 부모를 떠나려면 송곳니가 빠져야 한단다.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그 방향엔 관계없이. 하지만 성인의 송곳니가 빠질 수 있는 경우는 두 가지. 나이 들어 자연스럽게 빠지거나, 혹은 고의적으로 물리적인 힘을 가해 뽑아내거나. 절대자의 허락을 기다리거나, 혹은 절대자의 룰을 깨버리거나. 타의적으로, 혹은 자의적으로. 아마도 이들은 전자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겠지.

 

한 번도 자신의 인생을 살아보지 못했기에 주체성이란 것에 무뎌진 인간들. 그리고 그들 중 하나의 발악. 아마도 그곳을 처음부터 벗어나려던 것은 아니었겠지. 단지 절대자의 기형적 강요에서 도망치고 싶었을 뿐.

 

도망치는 순간에도 아버지의 말을 따르던 첫째 딸. 세상은 무서워서 차를 타고 가야 한다는 아버지 말을 기억하기에, 피를 흘리면서도 트렁크로 들어갔다. 집을 벗어나고서도 트렁크에서 나오지 않았다. 아니, 나오지 못했다는 표현이 맞는 걸까. 아버지를 벗어났으나, 벗어나지 못한 모습. 자발적으로 폭력의 굴레를 벗어나기엔 억압에 익숙해진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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