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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노트/생각노트

탈성장, 그리고 돌봄의 책임

by 이 장르 2020. 1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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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성장에 대한 커다란 오해 가운데 하나는 기존 체제 내에서 마이너스 성장이 이루어지는 역성장과 탈성장을 혼동하는 것이다. 탈성장은 성장률을 기준으로 경제활동을 평가하는 체제 자체와 소비주의에서 벗어나 사회적 연대 속에서 검소한 풍요를 누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 따라서 코로나19처럼 예기치 않은 재난으로 발생한 성장의 둔화나 경제축소는 탈성장이라 볼수 없다. 탈성장은 삶의 방향을 바꾸려는 의지와 노력에 수반되는 전환이어야 하며,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의지와 노력을 이끌어낼 사회운동의 역할이 중요하다.

- 백영경 '탈성장 전환의 요구와 돌봄이라는 화두'

성장이라는 것의 동력은 인간의 욕심이다. 오랜기간동안 인간의 욕심만으로 유지되었던 발전에 인간 외의 존재들을 위한 배려는 그어느곳에도 없었다. 다시말해 인간의 기준에서 발전이라는 것은 오직 인간을 위한 것이다.

자원은 한정되어있다. 한정된 자원으로 발전을 이뤄내려면 누군가의 희생이 반드시 필요하다. 누군가가 좀 더 편해진다면 분명 다른 누군가는 좀더 불편해질수밖에 없다. 의도하든 의도치않았든 결국 발전이란것은, 평등에서 불평등으로 가는 촉매제 역할을 하게된다. 그렇게 인간은 지구 내에서 포식 피라미드를 만들어 스스로를 최상위 포식자로 설정해두었다.

그렇다면 인간과 인간사이는 모두가 평등할까. 사실 꼭 그렇지만은 않은듯하다. 지구에서 피라미드를 만들어낸 것이 인간임을 감안한다면 인간세상이 불평등사회인것이 그리 이상하지도 않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러한 존재인지, 아니면 성장주의적인 환경이 인간을 이렇게 만들어낸것인지는 정의내릴수는없지만 성장주의또한 결국 인간이 만들어낸 결과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있다.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올라가 자신의 무게까지 타인에게 감당시키는 소수의 태도를 본받으라는 사회의 풍토는, 인간사이에 경쟁을 부추기며 비인간적인인간이 되기를 갈망하게끔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피라미드를 대략적으로 살펴보도록하자. 착취하는자와 착취 당하는자, 권력의 힘을 누리는자와 그러한 권력에 눌리는 자, 당연시 여겨지지않는것과 당연시 여겨지는 것 등으로 나눌수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평등을 외치면서도 사회속에 여전히 자리잡고있는 차별은 어떤것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일까.

사람들은 흔히 가정을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말하곤한다. 가정은 인간이 태어나서부터 보호를 받아야하는 곳으로, 인간의 사회성을 교육함과 동시에 정서적 안정을 찾는 곳이라고 생각하게끔 만든다. 사회에는 이상하리만치 가정을 이상화하고 신성시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주변에서도 느끼다시피, 이러한 이상적인 가정은 흔치않다.

사회가 가정을 강제로 이상화하는 이유는 한가지로 수렴한다. 그 대상이 정말 좋거나, 좋아질 가능성이 충분히 있을 때 대상에 대한 이상화를 시도하는것이 아니다. 모순적이게도 대상으로부터 너무나 다양한 문제가 야기될수있어 사회에서 해결할수없다는 결론이 나올때, 사회는 대상을 이상화하는 작업을 시도한다. 이러한 이상화 작업에 가정또한 포함되었던 것이다.

완전한 인간은 없다. 불완전한 인간과 인간이 결합하여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가고, 보호받기보다 보호를 해야하는 변화의 상황에서, 아무리 노력한들 빠른시간내에 불완전한 인간이 이상적인 관계를 쉽게 만들어내기란 불가능에 가까울것이다.

불완전한 것을 안정적인 것처럼 유지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희생이 포함되어야한다는것을, 우리는 암묵적으로 알고있다. 그렇다면 가장많이 희생되고있는것은 누구이며, 사회는 어느 부분을 숨기고싶어하는지에 초점을 맞춰 생각해보아야한다.

코로나가 시작되고나서, 사회에서 해결해야하는 돌봄의 일부를 가정으로 떠넘겨버리는 극단적 상황이 발생되었다. 분명 엄청난 발전이 이뤄졌다며 자랑스럽게 여겼었지만, 갑작스럽게 바뀌어버린 상황에 적용할수있는 부분은 극소수였다. 결국 우리는 자급자족의 시대로 퇴행해버린 것이다. 사회가 던진 돌봄을 떠받은 가정은 양육자로서의 업무가 늘어났다. 이것은 결국 여성의 사회생활 중단으로 이어졌으며, 사회는 성별이 여성인 인간이 가정으로 '돌아올'것을 강요받을것이라는 것을 알고있으면서도 외면해버렸다.

그렇다면 여성은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된다. 분명 이러한 상황속에서도 남성은 부양자와 양육자 중에 선택할수있는 여지가 있지만, 사회는 여성을 출산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당연스레 양육자가 되어야하는것처럼 묘사한다. 사회는 돌봄의 문제를 책임질생각이없으며, 거창한 이름으로 포장되어진 알량한 지원사업을 쥐어주며 전적인 책임은 개인에게 돌리기바쁘다.

이러한 상황에서 출산률이며, 혼인률 따위를 들이밀며 인구를 늘리는데에 기여하라는 말을 귀담아 들을 청년들이 있겠는가. 청년들은 한두명의 아이를 양육하기위해서 적어도 한명의 사회적 인생은 무너져야한다는것을, 이번 코로나를 겪으며 또다시 체감했다. 희생의 시간이 지난 후 사회에서는 어떠한 보상을 해주는가. 오히려 경력단절이라는 이름으로 또다른 차별을 만들어내고있진않은지.

 

페미니스트들은 돌봄의 책임이 가족 구성원, 그 가운데서도 여성들에게 과도한 부담을 지운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돌봄 정책의 근본적인 변화를 촉구했다. 예년에 비해 아동학대나 가정폭력 신고 건수가 줄어들었지만, 이는 학대와 폭력이 줄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드러낼 기회마저 적어졌기 때문이며 현장에서 체감하기로는 위험에 처한 이들이 늘었다는 보고도 나왔다. 코로나19 발발 이후 여성고용률은 남성에 비해 훨씬 더 큰 폭으로 하락했고, 여성 비경제활동 비율은 더 급격하게 증가했다.

- 백영경 '탈성장 전환의 요구와 돌봄이라는 화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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