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시인이야. 나는 미래를 보고 과거에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이야.
과거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는 시인이란 말이야."
"어디 죄수가 판사 검사를 돈으로 살 수가 있는 거야?"
"이 사회에서 목숨을 부지하기에는 너무나 살아갈 곳이 없다고."
세상의 가치를 매기는 기준은, 무엇으로 설정해두었을 때 가장 이상적일까.
오늘을 기준으로 내일 그리고 앞으로의 삶을 아름답게 꾸려낸다 해도 과거의 범죄는 지워지지 않는다. 과거도 자신의 일부라는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여야 하며, 결코 범죄자들의 범죄행위를 미화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범죄가 많았던 80년대, 그리고 그 시기보다 범죄는 줄었다지만 더 지능적이고 악랄해진 현대의 범죄. 반면 그 당시보다 턱도 없이 낮아진 형량과 하늘 높이 치솟아 끝없이 고공질주 중인 범죄자의 인권. 누구를 위한 수감인지, 누구를 위한 교정인지 가끔은 혼란스럽기도 하다.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 내가 노력할 수 없는 부분으로 받는 억압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분노가 되어 앞으로 살아갈 삶 속에 깊숙이 스며든다. 다시 말해 어린 시절에 느꼈던 억압과 억울함은 무기력을 거쳐 분노의 감정으로 변해 자리 잡게 된다. 그렇다면 후에 그 분노는 어느 곳으로 향하게 될까.
다행스럽게도 이 이야기에서, 분노를 머금은 당사자들은 그 분노가 어디로부터 만들어진 것인지, 자신의 목소리가 어느 방향으로 향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듯했다. 대부분의 경우, 무고한 사람들에게 그 범죄의 화살이 향했다는 것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들이 저지른 수차례의 절도는 당연히 범죄이며, 이에 대한 처벌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처벌과는 별개로, 이러한 것이 어디서부터 파생된 현상인지 인지하는 것은 사회의 몫이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어쩌면 세상은 그대로일지도 모른다. 3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세상은 이렇게나 많이 변해왔는데에 반해, 그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 꽤나 모순적이게 느껴지지 않는가. 돈이라는 것은 절대적인가 싶으면서도, 이러한 절대성을 정당화시켜버리면 결국 사회의 정의 또한 돈으로 매겨지게 되지 않을까 우려가 되기도 한다.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가치들을, 누군가는 돈을 주고 구매할 수 있는 세상이 올까 두려워진다. 아니, 어쩌면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사회는 이미 이런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현재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돈으로 사고파는 인적요소 중에서는 인간의 노동력만 있는 것이 아니다. 유감스럽게도 시장에는 인간의 시간, 감정, 그리고 인간의 고통까지 모두 전시되어 있다. 당신도 모르는 사이 당신의 고통이 값 매겨져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다. 그리고 그 고통을 구매한 자가 당신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즐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감스럽게도 우리가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미디어는 이러한 인적요소를 사고파는 것을 정당화하는데 한몫하고 있다. 크지 않은 화면 속에 꾸준히 흘려보내 그러한 것에 무의식적으로 무뎌지게 만든다. 이는 도덕성의 상실로 이어지며, 돈으로 인적요소를 사고팔았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인간을 더 이상 인간으로 보지 않게 된다. 이렇게 세뇌된 사회의 구성원들은 돈이 없는 사람들이 당하는 불평등에 묵인한다. 이들은 '고통스럽지 않을 권리'를 구매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앞으로 30년 후에도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쓰이고 있지 않을까 싶다. 흐르는 물살을 따라 흘러가듯 당연한 결과가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기성세대가 미처 해내지 못했던, 탈 성장주의의 관점에서 책임감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한다. 30년 후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사람이 귀한 세상이 되었으면 한다. 부디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말을 과거에 두고, 앞으로 향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길 바라며.
평범하고 단란한 우리 가정에 10월 11일의 새벽은 잊을 수 없습니다. TV와 라디오를 통해 알고 있는 교도소 탈주자들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모두 겁을 먹었지만 이들의 행동은 시간이 흐를수록 부드러워졌습니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식사도 커피도 먹고 마시게 되었습니다. 전국적으로 국민들을 놀라게 하고 사회적으로 혼란을 가져오게 한 이들 모두는 마땅히 죗값을 치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허나 이들에게서 나쁜 범죄자의 냄새가 아닌 인간다운 눈빛을 읽었고 후회의 마음도 엿볼 수가 있었습니다. 통풍이 안 되는 집안에서 담배 연기와 알 수 없는 답답함으로 이들과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새벽을 맞이했습니다. 아침밥을 먹은 이들은 ’잘먹었습니다 아주머니 신세 많이 지고 간다‘는 말들을 남겼습니다. 맨 나중에 남은 지강헌과 강 씨 두 사람은 우리 식구에게 자기들이 떠나면 곧 신고를 하라고 하였으며 아울러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발길을 돌렸습니다. 이들이 가고 난 후 솔직히 우리 네 식구 모두 울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흐르는 눈물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죄는 미웠지만 사람은 미워할 수가 없었습니다. 부디 이 탄원서를 읽으시고 다시 한 번의 기회를 주셔서 희망의 빛을 벗삼아 세상에 좋은 등대지기가 되게 하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 인질의 탄원서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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