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날씨는 역시나 예상하기 어려웠다. 루브르 박물관 건너편 끄트머리부터 먹구름이 찬찬히 밀려오기 시작했다. 분명 가만히 서있는데도 우리의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바람의 리듬을 타고 일렁거렸다. 아, 곧 비가 오겠구나.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유럽이라는 곳을 여행하기 위해 모인 일행이었지만, 원하는 여행이 각자 달랐기에 들러보고 싶은 곳이 달랐다. 어쩌면 누군가에게 모든 일정을 맞춰주는 것보다 서로가 가보고 싶었던 곳을 다녀오는 것이 더 행복한 여행이 아닐까. 이 생각에 우리는 암묵적으로 동의한듯했고, 그 누구도 이것에 대해 서운하다거나 짜증을 내지 않고선 각자의 발길이 닿는 대로 향했다.
파리지앵이라는 단어에 로망이 있었던 걸까. 아침에 먹었던 파리의 빵이 기억에 남았던 나는, 카페에 앉아 커피와 빵을 즐겨보는것도 좋겠다 싶었다. 마침 조그마한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어깨를 적셔갔다. 두 손을 대강 머리 위로 올려 둘러싸고선 비를 피할 곳을 찾기 시작했다. 겸사겸사 들어선 카페에서는 빵부터 시작해서 케이크, 그리고 얼굴만 한 크기의 마카롱도 있었다.
비가오면서 날씨가 차가워졌다. 이때 카페에 들어선 나는, 따뜻한 카페라테를 시켰던 것으로 기억한다. 몽글 몽글이란 표현보단 좀 더 둔탁하게 내리던 비를 피해 앉은 테이블 위에는 손바닥보다 큰 크루아상 두 개가 놓여있었다. 비를 좋아하지 않은 편이지만, 빗소리를 들으며 비 오는 파리를 배경으로 빵과 커피를 먹고 있자니, 그런대로 나쁘지 않았다. 어쩌면 비가 좋아질 수도 있겠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을 정도이니.
란 언니와 내가 조그마한 테이블에 마주 앉아, 처음으로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인천공항에서부터 함께했던 일행이라지만 우리는 함께 시간을 보낼일이 거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각자의 일정을 스스로 만들어가 야하기 때문에 서로 원했던 여행을 그리며 나름대로의 계획을 짰고, 그렇기에 가고 싶은 곳이 겹쳐야만 함께 할 수 있었다.
우리는 빗소리를 배경삼아 어떻게 유럽여행을 결심하게 되었는지, 이 여행이 주는 의미가 어떻길 기대하는지, 한국에서는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비가 잦아들기까지 나눈 대화였지만, 짧지도 또 길지도 않았던 대화였다. 우리의 시간은 빗속으로 흘러들었다. 그렇게 그날의 우리는 그렇게 파리에 녹아들었다.
푸르기만 했던 하늘이 이내 조금씩 붉은빛을 띠기 시작했다. 하늘의 채도가 점점 낮아지며 다음날을 기약하기 위해 아쉬움을 남기고 있었다. 그리움, 그리고 아쉬움으로 만들어낸 밤거리의 빛들은 예정된 어둠을 밝히기 위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 시간대 즈음 바토무슈 유람선에서 야경을 보면, 줄지어진 파리의 건물들을 배경으로 센 강 위의 하늘의 변화를 찬찬히 구경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어디에선가 전해 들은 적이 있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바토무슈 유람선을 타기 위해 카페에서 나와 선착장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가 남긴 여운은, 우리가 파리에 느끼고 있는 여운의 색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선착장에 도착했을 때 즈음 저 멀리서 다른 일행들이 보였다. 해 질 녘부터 야경까지 볼 수 있는 이 시간에 약속이라도 한 듯 이곳으로 모여들어 바토무슈를 기다렸다. 아직 봄이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해 질 녘엔 여전히 찬기가 감돌았다. 선착장 안쪽 휴게소에 들어가서 몸도 녹일 겸 가지고 있던 동전을 털어 커피 몇 잔을 샀다. 대부분은 커피를 마시기보다 손을 녹이는 용도로 쓰려했고, 우리도 거의 그런 이유로 커피를 샀다.
곧이어 저 멀리서 다가오며 점점 커지던 유람선에, 사람들은 다가오는 유람선을 보기 위해 고개를 쭈욱 내밀고 있었다. 직원에게 표를 보여주고 유람선에 한 발을 내딛는 순간, 출렁이는 물과 함께 유람선도 덩달아 움직여 균형을 잡기 쉽지 않았다. 다들 어떻게 그렇게 각자 자리를 잘 잡아가는 건지 의문이긴 했으나, 나도 곧 물의 흐름에 적응해 창가 쪽 자리를 잡아 앉았다. 드디어 야경을 눈에 담아 갈 준비를 마쳤다.
해가 뉘엿뉘엿거리며 끄트머리에 달린 빛까지 끌어당겨 떠나자, 하늘은 이내 짙은 파란색을 띠었다. 건물들도 하나둘 노란 불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곧 있으면 더 짙어져겠지. 여기저기 심어져 있던 빛이 한 도시의 야경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분명 각자의 개성이 있을 테지만, 야경이라는 이름으로 조화를 이뤄낼 수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또 낯설기도 하고.
차가운 공기를 가로지르며 센강 한가운데에 서있는 우리는, 아직은 겨울의 여운이 남아있는 이곳을 만끽하기 위해 유람선 밖으로 나와 카메라를 켰다. 아름답다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동안 바 왔던, 어설프게나마 유럽의 느낌을 따라 하려던 거리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영화 속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 떠나기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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