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파리에서의 마지막 날이라니. 어제저녁에 봤던 바토무슈의 야경이 아직도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시차에 적응하지 못했다. 정신이 몽롱한 상태로 잠들었기에, 오늘도 지각을 해버렸다. 함께 베르사유 일정을 따라가기로 했던 혜도 함께 늦잠을 자는 바람에 둘 다 정신이 없었다. 빠르게 준비를 하고선 숙소 로비로 내려왔다. 로비는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시간을 확인해보니 약속된 시간이 이미 지난 터라 먼저 출발했겠거니 하며 망연자실했다.
베르사유에 가기로한 일행들을 확인하기 위해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혼자 조식을 먹고 있던 흥 대장을 발견했다. 베르사유는 물 건너갔구나. 혜와 함께, 우리도 대장처럼 조식을 먹을까 하는 고민을 하고 있었다. 흥 대장은 우리를 발견하고선, 아까 현 대장과 사람들이 함께 출발한듯하니 전화해 보라 했다. 당연히 베르사유 일행과 합류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우리는, 우선 현 대장에게 연락을 해보기로 했다. 전화를 받은 현대장은, 아직 멀리 가지 않았으니 지하철역에서 우리를 기다리겠다고 했다. 뜻밖의 소식에 우리는 빠르게 밖으로 나가 어제 원오 빠가 알려주었던 뒷길을 통해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역 입구에서 우리를 기다리던 두 일행과 현 대장을 발견했고, 우리는 더 빠르게 뛰었다. 분명 어제도 이랬던 것 같은데, 데자뷰인가.
역으로 들어간 우리는 능숙하게 표를 샀다. 파리에 온 지 얼마나 됐다고 이게 익숙해져 버렸다. 뭐, 이곳에 오래 머물고 싶은 마음에 그런 걸 수도 있겠다. 지하철을 타고 얼마 걸리지 않았던, 혹은 꽤나 가까워 걸어 다닐 수 있었던 다른 관광지와는 다르게, 베르사유 궁전은 지하철을 꽤 오랜 시간 탔다. 심지어는 환승까지 했더랬다. 어두운 조명이 늘어서 있던 여느 지하철역과는 달리, 이 역은 지상에 있어 사방이 확 트여있었다. 곧 열차가 역으로 들어오고, 우리는 열차 2층에 올라가 자리 잡았다.
출발하기 전까지 일행들과 앞뒤로 마주 앉아 구경하기 위해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는데, 갑자기 1층에서 한국어로 소매치기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우리 일행의 목소리였다. 놀라서 일어나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 섰더니, 한국인 모녀가 있었고 그 뒤에는 두 명의 외국인이 서로 눈을 마주치며 씩 웃고선 어깨를 으쓱거리며 다른 곳으로 사라졌다. 우리는 그 모녀를 2층으로 데려왔고, 우리가 타고 남은 좌석에 앉게끔 했다. 아까 일로 놀라 창백해진 중년 여성과 우리 나이 또래쯤 되어 보이는 여자는 진정하는 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중년 여성은 우리에게 고맙다며 커다란 초콜릿 한 덩이를 쥐어주었다. 창밖으로 파리 중심부에서 멀어지고 있는 풍경이 꽤 오랜 시간 지나갔을 무렵, 베르사유 역에 도착했다.
파리뿐만 아니라 어느 지역을 여행하든지 간에 언제나 예상하지 못한 요소들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것이 꼭 나쁜 일만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예상치 못한 요소들은 우리를 놀라게 한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인스타그램에서 봤던 여행사진은 그 여행 중 가장 빛났던 순간의 모습만 골라 보여주고 있기에, 우리는 그 사진을 보며 여행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소매치기를 당했다던지, 인종차별을 당했다던지, 좋지 않은 경험은 굳이 인스타그램에 올리지 않으려 한다. 여행이란 것이 꼭 아름다운 순간만 있진 않다는 것을, 이번 유럽여행을 하면서 경험하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좋지 않은 경험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에 있으면 할 수 없을 경험들을 새로운 곳에서는 우연한 계기로 하게 될 수도 있다. 어쩌면 여행이라는 것은 내가 제어할 수 없는 환경을 받아 들 일수 있게 해 주는 경험이 아닐까 싶다. 사실 이러한 불확실성이 여행의 묘미이기도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베르사유 궁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파리는 여전히 마그네틱선이 붙여진 지하철 표를 사용한다. 이 표는 꽤나 예민해서 접히거나, 전자기기 가까이에만 있어도 금세 사용할 수 없는 표가 되어버린다. 분명 어릴 때는 이 표를 썼고, 그때는 딱히 불편을 느끼지 못했는데, 지금은 교통카드를 사용하니 마그네틱이 붙어있는 예민한 표가 성가시게 느껴지기도 했다. 결국 베르사유까지 다녀오는데만 표를 세 번이나 새로 발급받아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베르사유는 나에게 아름다운 곳으로 기억되고 있다. 아마도 날씨가 너무나 화창해서 덩달아 기분이 좋았던 탓일까. 관광지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여유는 내가 실컷 들뜰 수 있도록 내버려 두었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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