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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좋은 책 ::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 '타인에 대한 연민' 후기 -2-

by 이 장르 2021.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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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젤과 그레텔', '빨간 모자'라는 두 전래동화 모두 악당은 죽고 문제는 해결된다. 우리는 정돈된 세상을 갈망하기 때문에 간단하고 헛된 해결책의 유혹에 쉽게 빠진다. 복잡한 진실을 파고드는 일은 어렵고 개인의 기쁨을 보장하지 않는 세상에서 희망을 품고 사는 것보다 마녀를 불태우는 편이 훨씬 쉽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분노한다. 누군가는 분노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이러한 분노를 이용한다. 분노하는 다수에게 분노를 배출할 타깃을 설정해 주는 것만큼 효율적인 지배 방법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다수는 설정된 타깃에 분노를 표출하며, 분노라는 감정을 공유하는 이들에게 유대감을 느끼고, 연대한다. 이들은 같은 대상에 분노한다는 이유만으로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선동'이라 부른다.

대다수는 타깃이 된 대상에게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는지에 대해 관심이 없다. 그들은 그저 분노할 대상이 필요했고, 교활한 소수의 몇몇 사람들에게 분노가 향할 방향을 제시받았을 뿐이다. 누가 어떻게 희생되는가에 대해서는 중요치 않다. 무결한 듯, 우월한 듯 누군가에게 분노를 쏟아냈지만, 사실 모두가 완벽한 인간이지 못했다. 결국 우리 모두 가해자였다.

 

 

두려움을 잊으면 사랑도 잃게 된다는 것이 문제다. 사랑과 두려움의 기본은 통제할 수 없는 누군가 혹은 어떤 대상을 향한 강한 애착이다. 타인을 사랑하거나 국가를 사랑하는 일보다 우리를 취약하게 만드는 건 없다. 두려움은 종종 합리적일 때도 있고, 비탄은 현실 세계 어디에나 존재한다.
.....
온전히 사랑한다는 것은 곧 고통을 뜻한다. 그러므로 두려움과 분노를 한 번에 몰아내는 해결책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사랑을 지킨다는 것은 곧 두려움도 유지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두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지키고 싶은 것이 여전히 나의 세상에 존재하고 있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또 그게 언젠간 나에게서 떠나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이끌어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나 떨쳐버리고 싶던 두려움이란 감정이,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삶이 사랑하는 것들로 채워져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랑은 없다. 모순적이게도 그렇기에 사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사랑한다는 말은, 두려움을 기꺼이 감내하겠다는 선언이 아닐까.

결국 사랑의 다른 이름은 두려움이었다.

 

 

희망과 관련된 행동은 간혹 두려움으로 인한 행동과 비슷하다. 나쁜 가능성을 제거하는 것은 좋은 가능성을 불러오는 것과 매우 비슷하기 때문이다. 위험에 대한 건강하고 균형 잡힌 두려움은 안전과 건강을 보장하는 회피 전략을 촉발한다. 하지만 차이는 있다. 두려움에 가득 찬 환자는 이성적인 사고가 불가능할 수 있다. 희망적인 환자는 더 적극적으로 해결책을 찾을 것이다. 그리고 아직 자세히 밝혀지진 않았지만 희망 그 자체로도 효과가 있다. 플라세보효과는 다양한 상황에서 희망을 생각하는 일이 실제로 개선 효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실 우리가 느끼는 모든 감정은 무색무취를 기본값으로 한다. 단지 누가 그 감정을 마주하는가, 또 우리가 어떠한 태도로 그 감정을 사용하는지에 따라 감정의 색과 채취가 달라지는 것이다. 우리는 생각지 못한 감정을 마주해야 하는 순간에, 그동안 우리가 가지고 있던 관념으로 그 감정을 바라보게 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사유를 해야 하는 것이다. 무언가에 대해 꾸준히 생각하고, 그 생각에 나의 가치관을 입힐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해진다면, 예기치 못하게 마주한 어떤 것에 대하여 편협한 시각을 적용할 가능성이 줄어들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사회적 편견에 가려져 일부만 드러나있는 것의 이면을 찾아내는 것이,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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