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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좋은 책 ::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 '타인에 대한 연민' 후기 -1-

by 이 장르 2021. 5.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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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철학은 권위적인 선언이 아니다. 타인보다 더 깊이 있다는 주장도, 현명하다는 과시도 아니다. 철학은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겸손한 마음을 바탕으로 진실하게 논쟁을 주고받겠다는 약속이다. 평등한 인간으로서 기꺼이 상대의 의견을 듣겠다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성찰하는 삶을 뜻한다. 이와 같은 소크라테스식 개념에 따르면 철학은 무언가를 강요하지도, 위협하지도, 무시하지도 않는다. 공허한 주장을 하지 않되, 듣는 이가 언제든 반박할 수 있는 전제로부터 결론을 도출하는 사고의 구조를 세운다.

 

 

우리는 철학이 곁들여진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그걸 의도했든 의도치 않았든. 하지만 사회는, 철학의 존재가 직접적으로 돈을 만들어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쉽게 외면해버린다. 그렇게 우리는 자의적으로든 타의적으로든 당장 눈앞에 닥쳐온 삶의 문제들로 철학을 가려버렸다.

결국 개인을 철학으로부터 분리시키려는 고의적이었던 사회의 격리는 성공을 이뤄냈고, 우리는 철학에 익숙지 않아 따분해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스스로를 알아가려는 시도를 하기 위해서는 철학이라는 요소가 필수적이지만, 철학적 사고를 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철학이란 여전히 접근하기 어려운 분야로 남아버린 것이다.

철학적 사고를 시도하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타인보다 우월하다는 감정을 느끼기 위함이 아니다. 스스로 어떤 존재인지 깨닫고, 그 깨달음을 기반으로 내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에 대해 고민해 볼 수 있는 방법을 알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제시하는 설명서쯤으로 생각하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다. 하지만 철학과 가까워 보이고 싶으나,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 싶어 하는 것을 내켜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듯하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철학적 사고능력이 부족하며, 그렇기에 스스로뿐만 아니라 타인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은 흔치않다. 하지만 그 원인을 개인에게서만 찾으려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사회는 오래전부터 개인이 철학적 사고를 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으며, 시스템을 통해 철학적 사고를 굳이 하려 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결국 우리가 철학적 사고에 익숙지 않은 것은 사회적 시스템의 결과물인 것이다.

 

감정은 공동체를 와해시킬 수도 있지만 협력을 증진하거나 정의를 향한 노력에 힘을 실어줄 수도 있다. 감정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맥락과 규범에 의해 다양한 방식으로 형성된다.

 

 

인간이 본래 내면에 감정이란 것을 담아낼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우리가 지금 느끼고 표현할 수 있는 감정들을 기본값으로 깨닫고 사용할 줄 아는 상태에서 세상에 나왔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감정이 사회로부터 들어올 수 있는 여지가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후천적으로 익히게 될 감정이란 것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 기본값으로 설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태어나는 순간, 사람이 느낄 수 있다는 감정은 이미 사회적으로 규정되어 있다. 분명 모든 감정은 입체적으로 작용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대체로 그중 하나의 면만 취사선택해서 사람들에게 주입한다. 결국 인간에게는 감정에 대한 선택권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우선적으로 사회는 개인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사회는 개인이 사회를 위해 희생하기를 원한다. 이 불공평한 거래를 꾸준히 이어나가기 위해 사회는 개인의 사유를 차단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렇게 우리는 무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틈이 없도록 만들어진, 사회가 만들어둔 시스템에 따라 살아가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가기에 이러한 시스템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감정은 태어날 때부터 기본값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다. 사회를 살아가면서 사회적으로 규정된 감정은 후천적으로 학습되어 얻어진 것이다. 결국 사회가 규정해놓은 대로 사고할 수 있도록 인간의 무의식 알고리즘을 통일시키는 작업을 하게 되는 것이다.

 

 

 

현대 민주주의처럼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 역시 분노가 문제였다. 웅변가들의 연설과 역사학자들의 글을 읽어봐도 알 수 있다. 개인은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비난하며 집요하게 논쟁했고, 집단은 다른 집단을 비난했으며, 시민들은 유명한 정치인들이나 엘리트 계층이 민주주의의 소중한 가치를 배신한다고 비난했다. 개인적, 정치적 문제의 원인을 외국인이나 여성들에게 전가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감정은 입체적이다. 분노 또한 예외는 없다. 이분법적인 분류를 지향하진 않지만 이해하기 쉽도록 분노를 '건강한 분노'와 '불건강한 분노'로 나눠 보도로 하자. 오래전부터 분노는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매체에서 보고, 직접 경험했던 기득권층은 분노를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분노는 부정적인 분노 라인 것이다. 사실 자신의 욕심을 위해 사용된 분노는 분노라는 감정의 일부분일 뿐이다.

어쩌면 우리가 건강한 분노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건강한 분노라는 것은 보고 듣지도, 누군가에게 배우지도 못했다. 우리는 그렇게 분노의 일부분을 확대하여 분노라는 감정을 익혔다.

피라미드 꼭대기부터 시작된 불건강한 분노는 인간의 욕심을 원동력으로 하여 끝없이 생산되고 있다. 누군가가 분노한 만큼 윤택한 삶을 얻을 수 있는 모순은 점점 당연한 것이 되어갔다. 그로 인해 만들어진 분노는 피해자들에게까지 전파되어, 살아남기 위한 생존형 분노의 형태로 변모해갔다. 불건강한 분노는 점차 피라미드의 아래로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고, 그렇게 우리 사회를 점차 집어삼켰다.

결국 누군가의 욕심으로부터 시작된 분노의 결과는 사회적으로 가장 약했던 이들이 견뎌내야 할 몫이 되었다. 끊임없이 끝으로 몰려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져 버린 이들의 삶은 누가 보상해 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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