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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좋은 책 ::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 '타인에 대한 연민' 후기 -3-

by 이 장르 2021. 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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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들은 기아나 질병, 삶의 각종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두려움을 가라앉히는 방법을 이성적 사고를 통해 배우지 않는다. 그보다는 못생기고 불구인 짐승, 도깨비, 마녀, 인간의 말을 하는 동물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에게 두려움을 투사하고, 그들을 통제하고 지배하면 삶이 더 안전해질 거라고 믿는다. 고대 로마 시대에도 마녀들은 혐오스럽고 역겨운 존재로 묘사되었다.

 

 

 

당신이 인지하고 있든, 그렇지 않든 인류는 끊임없는 무지의 상태를 이어오고 있다. 혹은 자신의 무지를 인지하면서도 무지를 극복하기 위한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고 있다. 알다시피 문제를 직면하기보다 외면하는 것이 더 편하다는 것을 알기에, 당장의 급한 불을 끄듯 두루뭉술하게 넘어가기 위한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낸다.

지배계층은 사회의 문제를 직면하여 해결하기보다 피지배계층의 분노를 일시적으로 분출해 달래주는 방향을 선택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분노의 대상이 필요했고, 그 대상은 대부분 사회적 약자로 불리는 계층이었다. 우리는 이렇게 만들어진 것을 마녀사냥이라고 부른다.

 

 

성소수자를 향한 폭력에 대해 연구하는 게리 데이비드 콤스탁(Gary David Comstock)에 따르면 타깃 선택의 이유는 뿌리 깊은 증오가 아니라 단지 경찰이 그들에게 관심이 없어 그들을 공격해도 처벌받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었다. 극보수주의는 약간 다른 방식으로 작용해, 소수 집단에게는 공적 보호가 느슨해진다는 신호를 잠재적 가해자에게 보내게 될지도 모른다. 결국 그들은 처벌 없이 시비를 걸 수 있는 대상을 반대하고 나서는 것뿐이다.

 

 

 

인간은 자신이 우위를 점하기를 원하는 습성이 있다. 타인을 누르고 자신이 권력을 쥐려는 행위부터 상대방에게 착한 모습을 보여 도덕적으로 우위를 점한 사람으로 보이게끔 하는 것까지 말이다. 성소수자에 대한 분노는 성소수자가 소수이며, 그렇기에 그들을 보호하는 규정이 별도로 만들어져있지 않기 때문에 성소수자를 타깃으로 삼은 것뿐이다. 다시 말해 그들의 분노는 성소수자가 다수와 다른 결의 성향을 지녀서가 아니라, 인간이 기본적으로 지니고 있는 분노를 해소하기 위해 법적, 제도적 보호가 비교적 적은 그들을 타깃으로 삼은 것뿐이다.

 

 

혐오가 신체의 취약성과 역겨움에 대한 두려움과 관련이 있다는 나의 설명은 급증하는 편견에 대해 생각할 점을 더해준다. 사람들은 큰 불안을 느낄 때 취약한 집단을 비난하며 성급하게 희생양으로 삼는다. 우리는 이제 혐오를 외부로 투사하는 그들이 자기 신체의 취약성과 유한한 목숨을 인식하고 있음을 안다. 혐오는 언제나 두려움을 유발하는 특정한 생각과 결합된다. 하지만 혐오가 두려움에 관한 것이며 구체적인 두려움들의 집합이 연료가 된다면, 다른 조건이 같을 때 불안정한 시기일수록 혐오 집단의 필요성이나 낙인의 강도는 높아질 것이다. 이를 인식한다면 숨겨진, 그리고 이미 어느 정도 드러난 편견을 물리치기 위한 정책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오래전부터 인간은 혐오를 이용해 권력을 만들고 유지해왔다. 인간의 혐오는 두려움에 대한 방어기제이며, 그러한 본질적 두려움을 감추고 부정하기 위해 외부로 분노를 발산하려 한다. 하지만 여전히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기에 분노의 대상을 고르는데에 있어 꽤나 주의를 기울인다. 자신이 그 대상을 향해 분노를 발산했을 때, 자신에게 그 분노 혹은 그보다 더 큰 분노가 돌아오지 않을 것인지에 대해 고려를 하여 대상을 선정한다.

다수의 분노에 대한 타깃이 되는 것은 우연한 경우가 아니다. 애초부터 자신이 분노했을 경우에 대한 계산이 이미 다 끝난 후 실행에 옮기는 것이다. 결코 충동적인 행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1869년, 존 스튜어드 밀이 자신의 저서 '여성의 종속(The Subjection of Women)'에서도 밝혔듯이 성차별주의의 논리는 몹시 불합리하다. 1872년, 영국 의회에서 처음으로 여성 참정권을 요구했던 밀은 성차별주의자들이 여성이 무능력하다고 판단하는 데 자신이 없을 거라고 지적했다. 그렇지 않으면 여성들이 할 수 없다는 그 일을 여성들이 하지 못하도록 너무 열심히 막을 필요가 없다면서 말이다.

 

"여성이 타고난 본성 때문에 할 수 없는 일이라면 하지 못하게 막을 필요가 없다."

......

성차별주의자는 이렇게 말한다. "불쌍한 여성들, 언제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지."

여성 혐오자는 이렇게 말한다. "빌어먹을 여자들이 못 들어오게 해."

밀이 말했듯이 성차별주의자와 여성 혐오 사이의 긴장은 크다. 여성들이 정말 나약하고 특정 영역에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해당 분야에서 자연스럽게 도태될 것이다. 그러므로 여성들을 막기 위해 장애물까지 세우느라 고생한다면 남성들이 이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는 뜻이다.

 

 

 

앞에서 말했던 바와 같이 분노는 두려움에서 파생된 방어기제이다. 이것을 여실히 드러내주는 사례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어느 대상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그 두려워하던 일이 실제로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필사적으로 막으려 할 것이다. 지금까지, 아니 지금도 여성은 인간이라는 점 보다 여성이라는 성별이 더 강조된 삶을 강요받았다. 사회에서 말하는 여성의 삶은, 사회에서 인간으로 칭하는 남성이라는 존재가 자신의 능력을 펼칠 수 있도록 지지해 주고 지원해 주는 그림자 같은 역할이었다. 하지만 이상하지 않은가. 같은 인간인데도 성별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역할이 달라진다는 것이 말이다.

놀랍게도 여성이라는 성별에 희생이라는 요소는 기본값이 아니다. 이전까지는 이것을 깨닫지 못하게끔 사회적으로 고정관념을 만들어 주입시켜왔지만, 지금은 사유하는 이들이 늘어나 사회의 관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확실히 개인이 똑똑해지고 있다. 사회적 두려움으로 통제되는 개인은 과거에 비해 현격히 줄어들고 있다. 이는 여자뿐만 아니라 남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근본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여성이 왜 혐오의 대상이 되었는지, 그리고 그 분노를 통해 사회와 기득권층은 어떠한 이득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또한 우리는 이러한 분노를 통해 어떤 것을 잃게 되는지, 이러한 상실로 인해 누가 이득을 취하고 있는지를 말이다.

 

 

" 많은 사람들이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다고 여기게 될 때, 변혁은 시작됩니다." 

- 어느 역사 유튜버의 영상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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