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약자들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그들의 말을 어떻게 해석하며 기록하고 있을까. 기록이라도 한다면, 그나마 다행일지도 모른다.
그 당시의 여자들은, 넓은 세상에서 태어나 비좁은 집안으로 밀려나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들의 몸집이 커질수록 그들의 세상은 좁아지기를 강요받았다.
차별은 분명 문제가 있는 것이지만, 차별에도 급이 나뉘어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난, 일말의 노력 없이 얻어낸 무언가로 행하는 차별, 그리고 자신이 노력으로 얻어낸 것으로 행하는 차별.
사람은, 앞서 말한 후자처럼 자신의 노력이나 능력으로 얻어낸 것이 없을 경우, 자신이 노력 없이 얻어낸 무언가로 차별을 행하곤 한다. 우리가 근본적으로 지니고 태어나는 것. 대체로 피부색, 성별, 키, 외모 등.
다시 말하자면, 자신에게 남아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지만, 노력은 하고 싶지 않으며, 타인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고는 싶은, 전형적인 하류다.
자유롭기 위해서는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결말이, 나에겐 아름답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여자들은 죽어야만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비극적 결말이 여자에 대한 사회적 태도를 비난하려는 작가의 의도였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기억해 둬. 여자가 저렇게 우는 건 재밌어서가 아니야.
1993년 개봉한 영화 치고는 개방주의적, 자유주의적, 여성의 주체성이 담긴 영화.
그 당시 지극히 ‘정상 루트’라고 치부되던 결혼을 거부하고 떠난 여자들의 이야기 었으니 말이다.
그 시대를 살아냈던 여성들이 어떤 취급을 당했는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던 영화였다.
아마 그러한 점에서 볼 때, 이영화는 고정관념을 깨버렸다는 평을 받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영화에서 델마는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여성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역할, 루이스는 간혹 일탈을 하는 진취적인 여성상 역할을 보여주는 듯했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계속적인 갈등을 만들어내기 위해 델마의 답답함을 넣어둔 듯한데, 그중 몇 장면은 꽤 겉도는 느낌이 들었다. 고의적으로 갈등을 만들어내기 위한 장면이라고 느껴졌으니.
영화가 진행될 때마다 발생하는 사건의 빈도, 시간의 흐름에 비해 너무나 갑자기 태도가 바뀐 델마가 영화 후반에서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다.
경찰들에게 포위돼 죽음으로서의 자유를 택하는 델마와 루이스의 엔딩 또한 고정관념의 일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작가의 의도였을 수도 있고, 작가가 작품을 만들어낸 시간과 영화를 보는 나의 시간이 달라 느껴진 부분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들을 충분히 멕시코로 보내줄 수도 있었지만 벼랑 끝으로 몰아세운 것이 어쩌면 여성들은 죽음 이외에는 이 세계의 규율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비극적 의미를 담아낸듯했다.
금요일 새벽까지 이 영화를 보고 잠이 들었다. 잘 꾸지도 않는 꿈을 꾸고, 그 안의 델마와 루이스가 러시아로 떠나 잘 살아가는 것을 꿈에서나마 확인하니, 나름대로 안심이 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왜 러시아였는지 나 또한 잘 모르겠지만, 그저 그들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이 아닐까.
'영화의 여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화 :: '동주(DongJu, The Portrait of A Poet)' 후기 (3) | 2020.06.02 |
---|---|
영화 ::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 후기 (2) | 2020.05.29 |
영화 :: '케빈에 대하여(We Need to Talk About Kevin)' 후기 (4) | 2020.05.25 |
영화 :: '그녀(Her)' 후기 (0) | 2020.05.22 |
영화 :: '존 말코비치 되기(Being John Malkovich)' 후기 (0) | 2020.05.2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