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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노트/생각노트

함께했던 시간들

by 이 장르 2022. 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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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를 성가신 존재로 바라보던 이들 사이에서 홀로 품어본 사유는 역설적이게도 나를 더 외롭게 했다. 그러던 중에 시작했던 시나리오 수업은 나에게 위로가 되어주었다. 아직은 가진 게 시간뿐이라, 살아가기 위해 그 시간조차 팔아야 했던 나의 삶에서 선생님과 나눈 이야기로 막혀가던 숨통을 조금씩 트여가고 있었다. 그저 내 글이 내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걸 볼 수 있단 생각에 벅차오르던 감정으로 시작했던 수업이 이렇게 위안이 되어 줄줄이야.

시나리오를 쓰고 싶다면서도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던 모순적인 나를 한 번도 이상하게 보지 않으셨다. 얼마 전 우연히 들춰보고선 한없이 부끄러워졌던 수업 초반의 과제들을 받아보시고도 그 어떤 평가조차 하지 않으셨다. 오랜 시간 정해진 답을 찾아내는 것, 그리고 명확한 무언가를 증명해 내는 것에 익숙해져 있던 나에게는 너무나 낯선 방식의 수업이었다. 그렇기에 열린듯하면서도 가슴 한편 무언가 꽉 막힌듯한 이 느낌을 한동안 지워낼 수 없었다.

어찌 보면 모호하게만 다가왔던 그 피드백들이 내가 주체적으로 시나리오에 대해 생각하고 수정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선생님은 내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해 주려 하셨던 걸까. 펜스로 둘러싸인 길만 걸어오다 울타리조차 없는 길에 덩그러니 놓이니 나 자신이 그 자유를 감당할 만한 사람인가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스스로 사유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선생님과 함께하는 시간 동안 나는 그동안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았던 걸 배워가고 있었다. 덕분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일말의 흔들림조차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대체로 나 자신을 믿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선생님과 함께했던 수업은 나에게 이러한 의미의 수업이었다.

그렇게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시간이 끝났다. 선생님과 함께했던 만 2년의 시간은 짧다면 짧았고, 길다면 길었다. 매주 돌아오던 수업 시간이 2년이라는 시간 동안 매 순간마다 기다려졌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명확하진 않지만 세상에 치여 수업이 익숙함으로 변해가던 어느 시점부터 처음 그 시작의 열정은 흔적만 남기며 슬그머니 숨어들어갔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이건 분명 나의 문제였다.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면서도 탁해지던 주변의 눈빛과 대비되던 그들의 빛나던 눈빛이 나를 매료시켰던 그때가 문득 기억이 난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사실이 사람을 빛나게 하는구나. 빛나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싶다는 막연한 기대로 시작하게 된 시나리오 수업이었다. 하지만 기대로만 가득 찼던 미지의 세계도 역시 사람이 뒤엉켜 살아가는 곳이었구나. 나는 무엇을 바랬던 걸까 하는 생각에 한없이 축 처지다가도 이 경험이 또 하나의 내가 되어줄 것이라 믿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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