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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으로서의 기록/2022 🇦🇺

🇦🇺값싼 우월감

by 이 장르 2023. 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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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일하면서 다양한 직업들이 한국과는 참 다르게 인식되는구나 싶기도 했다. 그중 하나가 바텐더라는 직업인데, 술에 워낙 약한 나는 바텐더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을 마주할 기회가 흔치않았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어느 곳이나 바텐더가 있었고, 함께 일하고 있는 코워커들 대부분이 바텐더니 이들을 마주하고 지켜볼 기회가 자연스레 많아지게 됐다.

이전까지는 바텐더가 단순히 술을 만들어주는 사람인 줄로만 알았는데, 사실 이들의 주된 일은 사람들의 말을 들어주는 거더라. 물론 흥미로운 얘기도 있겠지. 근데 대부분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주야장천 늘어놓는 이들이 대부분인듯했다. 나는 웨이트리스로 일하고 있기 때문에 대화를 하고 싶지 않으면 테이블 속으로 숨어들 수 있지만, 이들은 그 좁디좁은 바 안에서 도망갈 곳도 없이 시선을 저 멀리 두는 것만이 이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회피였다. 어쩌면 나보다 더한 감정노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들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흥미로운 건, 서로가 서로를 대단하다고 생각한다는 것. 우리들과 말할 때는 잘 웃으면서도 바텐더 일을 할 때는 가끔 이유 없이 화나 보이는 이들이 이해가 되지 않아 하루는 나미한테 이것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다. 나미는 한 곳에서는 바텐더로, 또 다른 곳에서는 웨이트리스로 일하고 있기 때문에 뭔가 이 궁금증을 해소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나미는 내가 이 질문을 하니 호탕하게 웃어재꼈다. 그러더니 그들이 갑자기 웃지 않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해주더라. 웨이트리스와 다르게 그들이 말할 때마다 웃으면 무례한 말들, 선 넘은 플러팅들을 서슴없이 한다고하더라. 그래서 그걸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그런 거라고. 그러면서 본인은 웨이트리스로 일하면서 항상 웃어야 하는 게 너무 힘들다고, 웨이트스탭들 진짜 대단하다고 하더라.

하긴. 생각해 보니 이런 경우들을 같이 일하던 바텐더들이 겪는 걸 많이 보긴 했다. 말도 안 되는 무례함을 당당하게 늘어놓는 걸 나는 견뎌낼 수 있을까. 아무래도 난 바텐더 일은 못할 것 같다.

얼마 전 제레미랑 둘이 있는데 어떤 남자 손님이 와서 탭 비어 가장 작은 사이즈를 하나 주문하고선 제이슨의 안부를 묻더니 화장실로 향했다. 레귤러는 아닌 것 같은데 이름을 물어보기도 좀 그랬는지 도켓에 그냥 'Man'이라고 적혀 나온 걸 보고 이게 뭐냐고 놀렸더랬다. 이때까진 참 괜찮았는데 문제는 이 남자가 와서 맥주를 마시고부터 시작됐다.

여전히 나의 영어실력은 좋지 않아서 모든 말을 완전히 이해하진 못했지만 확실한 건 꼰대스러운 발언들이 난무하고 있다는 것. 오지애였던 제레미한테 대놓고 오스트레일리아 젊은이들은 게으르다며 대놓고 말을 하더라. 정말 Lazy라는 단어를 면전에 대놓고 말하는 게 아닌가. 그러면서 비즈니스는 이런 이런 거다, 사람들이 게을러서 이걸 잘 모른다며 이리저리 궤변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어느새 홀은 그 남자의 목소리로만 가득 차버렸다.

말도 안 되는 말을 듣고 있던 제레미는, 그래도 세상이 바뀌고 있으니 이런저런 변화가 생기는듯하다는 말을 했지만 본인 말만 하기 위해 온 사람이 타인의 말을 들을 리가. 그렇게 20분간을 불쾌감 속에 머무르다 그 상황을 계속 지켜보던 레귤러 한 명이 제레미를 구해주기 위해 불러오며 기나긴 궤변은 마무리됐다.

가장 저렴한 맥주, 그리고 그중에 가장 작은 사이즈. 6불짜리로 얻은 20분간의 값싼 우월감은 과연 그의 인생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까. 그렇게나 풍부한 지식과 선견지명을 지닌 사람이라면 이렇게 이곳까지 와서 맥주에 돈을 쓸 필요도 없이 사람들이 먼저 이 사람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그를 찾아갔겠지. 단지 그가 원하는 것은 자신이 누군가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걸 확인받고 싶어 하는 값싼 자존심 때문이었으리라.

노력 없이 얻어내고 싶었던 그의 자존심은 또 그렇게 이곳을 나서는 순간 금세 사라졌을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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