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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으로서의 기록/2022 🇦🇺

🇦🇺그냥 여러 생각이 들더라고

by 이 장르 2023. 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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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날이 있다. 취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취한 게 더 낫지 않나 하는 기분이 드는 그런 날. 예상했던 것들이 들어맞으면서도 그 이유는 예상치도 못 했던 그런 날.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예상도 못했던 날에 들었던 그 기분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으랴.

오래간만에 함께 일했던 동료를 만났다. 사실 만날까 말까 고민을 많이 하느라 얘가 그만두고도 연락을 선뜻 먼저 하지 못했더랬다. 그러다 무슨 일로 그 친구가 먼저 연락해 줘서 만나기로 했는데 사실 만나기 전까지도 고민을 꽤 했더랬지.

고민을 했던 이유라면, 아직 미숙한 나의 영어실력. 그리고 그것 때문에 아직은 미숙한 인지력. 과연 내가 지금까지의 내 영어실력을 믿어도 될까 하는 의문. 그럼에도 내가 이곳에서 적응할 수 있도록 가장 많이 도와줬던 너였기에 내 직감을 믿기로 하고 만나기로 했다.

오랜만에 만난 너는 함께 일했던 그 시절보단 더 편안해 보였다. 참 다행이다. 미숙했던 나이에 이곳에 홀로 와서 억척스럽게 살아내야만 했던 너의 삶이 조금은 나아진듯해 마음이 놓였다. 사실 널 보고 있자면 과거의 나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사실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긴 하지만. 그래서 너에게 뭐라도 좀 더 챙겨주고 싶고 그랬던 걸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건 널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과거의 나를 위한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우리는 오랜만에 만나 그동안의 못다 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아직은 함께 일했던 사람들을 따로 만나지 않았다는 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오늘 이 자리에서 함께 있다는 게 참 고맙기도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우리가 함께 일하던 그곳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모두의 근황, 그리고 내가 느꼈던 너와 모두의 첫인상에 대해, 그리고 나의 영어가 늘어갈수록 느껴졌던 그 차이에 대해.

사랑받으며 자란 느낌이었던, 선천적으로 감성이 풍부해 보였던 J,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생각한 것과 너무나 달랐다는 얘기. 첫인상이 너무나 차가워 말을 잘 안 하게 됐던 T, 그리고 T를 알면 알수록 느껴지던 인간적인 외로움. 누군가에게 기대를 받아본 경험이 적어 보였던, 그래서 스스로에게 자신감이 없어 보였던 T의 분위기까지.

이 얘기를 하니 어떻게 알았냐며 놀라던 네 모습이 그저 재밌었다. 너는 나보고 타로 같은 걸 하냐고 했더랬지. 그래서 그런 너에게 내가 나이를 헛먹은건 아니라고, 나이가 괜히 있는 게 아니라고 말했더랬다. 그리고 너를 통해 듣게 된 T의 개인적인 이야기. 아, 그래서 그랬구나. 이상하게도 납득이 되지 않았던 T의 모습이 그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나서 퍼즐처럼 하나둘 맞아가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도 나름대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이곳에서는 더 다양한 삶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양성에 대해 개방적인 편이라 생각했던 나 자신이 사실은 편견에 사로잡혀있다는 사실이 나를 부끄럽게끔 했다. 얼마나 더 많은 경험을 해야 하는 걸까. 문득 나의 편견 어린 시선으로 T를 바라본 시간들이 미안해졌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 누구도 나와 당신의 삶을 쉽사리 판단할 순 없다. 설령 그게 가족일지라도 말이다. 당신만큼 당신의 삶에 대해 오랜 시간 고민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생각하는가. 물론 주변의 말을 듣는다면 좀 더 수월한 길로 갈 순 있겠지. 하지만 조금 둘러 가며 부딪히고 상처 입으며 얻을 수 있는 가치는 사라질 테지.

나는 엄마에게 그리 좋은 딸은 아닐 것이다. 엄마가 걱정 어린 시선으로 자신의 경험에 빗대어 대안을 제시해 줘도 그걸 대차게 외면해 버리곤 한다. 이게 좋은 태도라 말하려는 게 아니다. 단지 어떤 선택을 하든 그 선택으로 인한 좋은 부분과 좋지 않은 부분 모두 내가 감당해야 하는 몫이니, 혹여 그 선택으로 인한 고통이 감당하기 힘들 때 다른 이들 탓을 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엄마가 나에게 조언을 해줄 때 이런 답을 하곤 한다. 물론 딸이 힘든 길을, 좀 더 둘러 가는 길을 선택하더라도 그저 지켜봐달라고. 물론 엄마 말을 듣게 되면 좀 더 편하게 원하는 곳까지 도달할 수 있겠지만, 나에겐 이렇게 부딪히고 넘어지며 얻어 가는 가치도 소중하다고. 그리고 그것들이 지금의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준 거라고. 그러니 부모로서 쉽지 않겠지만, 응원까진 바라지 않으니 그저 지켜봐달라고. 어떤 선택을 하든 후회하지 않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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