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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으로서의 기록/2022 🇦🇺

🇦🇺언어가 달라 쉽게 알 수 없던 것들

by 이 장르 2023. 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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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와서 정말 많은 사람들의 호의와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영어를 못하는, 다른 언어를 사용하며 살아왔던 나를 배려하기 위해 상냥한 단어들을 골라 문장을 만들고 있다는 걸 간과하고 있었나 보다. 생각해 보면 나 또한 영어로 말할 때와 한국어로 말할 때 내가 느끼는 나조차도 다른데 말이다.

말은 그 사람의 많은 것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어떤 단어를 사용하는지, 어떤 것에 대해 주로 말을 하려 하는지 등을 통해 그 사람의 가치관까지 알아볼 수 있으니. 물론 사람이 풍겨내는 고유의 분위기를 읽을 순 있겠지만 가끔씩은 그 분위기를 무시하고 싶을 때가 있단 말이지.

내가 읽었던 J의 분위기는 사랑받고자란 사람 같았다. 표현이 풍부했고, 학습된 공감 능력이라기보다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공감 능력인 느낌이랄까. 밝아 보였고, 친절해 보였다. 함께 일하던 K가 간혹 무시하는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그건 그냥 K가 T를 더 좋아해 사겠구나 싶었다. 아무래도 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에 주방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는 모습에 더 좋게 보였는지도 모른다. 한국에서 호스피탈리티 알바 할때 간혹가다가 주방 사람들에게 함부로 하는 사람들이 있었더랬다. 그러다 보니 이런 모습까지 관찰하게 되는 건지도. 쨌든 내가 생각하던 J는 골든리트리버같은 사람이었다. 물론 내 영어가 조금씩 늘기 시작하면서 이게 맞나? 싶은 느낌이 들기 시작했지만 말이다.

내가 인지하던 J의 모습에 의심을 품기 시작한 모습은 일을 한지 2개월이 넘었을 때부터였던 걸로 기억한다. 분명 항상 밝은 줄로 알고 있던 J는 일을 할 때 본인의 부정적인 감정을 모두 표출하기 시작했다. 말을 할 때 선택하는 단어 또한 굉장히 직설적인 표현을 선택해서 사용했고, 타인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도 서슴없이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나 또한 친구에게 장난삼아 '모두 까기 인형'같다는 단어로 J를 표현했더랬다. 이러다 내 이야기도 다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겠구나 싶더라.

물론 내가 편했겠지. 한국어로 대화했더라면 대화의 흐름을 그대로 두지 않았겠지만 나의 영어실력은 그 정도로 좋지 않기에 그저 듣기만 했으니. 나는 J에게 대나무숲이었을까. 뭐 어찌 됐든 애 같다는 느낌을 쉽게 지울 수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J, 제이슨과 함께 일하는 날, 난 9시 퇴근을 하고 둘의 시프트는 마감이었다. 그날도 다음 주에 올릴 플레이리스트 작업을 하면서 T의 플레이리스트(T의 스포티파이 플리가 너무 맘에 들어서 양해 구하고 스포티파이 아이디 받아옴)를 돌아보고 있었다. T는 플레이리스트에 진심이라 분위기가 다른 여러 플리를 만들어두고 치즈 이름들을 붙여뒀었다. 이 플리는 18년도부터 차곡차곡 추가해둔 노래들이 모여있는데 그중 한 플리가 우리 매장에서 일하는 바텐더들끼리 공동작업자로 해서 만들어둔 플리었는데 이름이 '리코타'였음. 11시간 넘는 플리. 정확히 말하면 매장 플리가 아니라 T의 플리였던 거지.

분명 그날 새벽 1시까지 '리코타' 플리 들으면서 작업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멍 때리며 노래 들으려고 다시 이 플리 들어가니까 곡이 사라져있었다. 그리고 공동작업자로 있던 J가 빠져있었음. 처음엔 내 계정이 J한테 차단당했나 싶었다. 아니면 J가 뭘 잘못 눌러서 지워진 걸까. 분명 내가 어제 J랑 저녁 9시까지 함께 일하고 퇴근했으니 9시 이후부터 그다음 날 아침까지 무슨 일이 일어나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 아닌가.

스스로 차단당했다는 걸로 결론을 짓고 나서 12시 출근을 하기 위해 매장으로 향했다. T가 일하고 있음에도 오늘은 다른 플레이리스트가 매장에 틀어져있었다. 그러다 매장 아이패드에 리코타 플리가 열려있는데 슬쩍 보니 역시나 텅 비어있었다.

T와 같이 마감을 하면서 저 플리 왜 아무곡도 없냐고 물어보니 J가 모두 지워버린 것 같다 하더라. 어제 내가 퇴근하고 나서 그날 제이슨이 J를 해고했고(호주는 세가지의 고용형태가 있고, J의 고용형태는 그 중 'Casual'이라 당일 해고가 가능함), J는 화가 났는지 T의 플리에 있는 곡들을 모두 지우고 사라진 거였다. 제이슨에게 향해야 할 분노를 당사자가 아닌 다른 이의 것으로 화풀이를 했다는 것이 너무나 애 같이 느껴졌다. 이곳에 와서 J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던 나지만 이 부분에 있어서 한순간에 정이 떨어져 버렸다.

황당해하는 내 표정을 보고 괜찮다며 말하는 T에게, 이건 안 괜찮은 거야라고 말을 하긴 했다. 물론 내가 느낀 T의 성격상 화가 안 났을 리 없었겠지만 나에겐 굳이 티 내지 않으려 하는 것 같았다. '(J의 행동이) 좀 Silly 했지?'라는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아마 얘도 내가 부정적인 단어에 동의한 걸 처음봤을걸.

내 기억 속 T의 첫인상은 그렇게 좋지 않았다. 일을 열심히 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객관적으로 잘생기긴 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따라오는 여자들의 이성적 호의를 잘 활용한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내 많은 실수들을 수습해 준 고마운 사람이지만 나 외의 사람들과 함께 일할 때는 많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더랬다. 그래서 함께 마감을 하기 전까진 그렇게 가깝게 지내진 않았었지.

T는 내향적이면서도 나름의 고집이 있고, 사람을 좋아하지만 인간적인 외로움을 품고 있는 분위기를 풍겼다. 무표정일 때는 눈빛이 차가운 편이기에 전체적 인상 자체가 차갑게 느껴졌다. 바텐더이기에 스몰 톡을 잘하면서도 그 스몰 톡과 공감하는 모습이 학습된 것 같다는 느낌을 크게 받았다. 단어 선택도 직설적인 단어는 되도록 피하려는 게 느껴졌다. 학습된 공감 능력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가끔 어색하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을 뿐. 나에게 T의 미소는 참 어색했다. 이곳의 오지들이 그렇듯,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웃지 않으니. 물론 그게 잘못됐다는 건 아니지만 입보다 눈을 먼저 보는 문화권에서 살아온 나로선 이게 참 어색했다. (근데 손님들은 잘 웃는다고 느끼는 듯. 손님으로 와서 친해진 한국인 여자애가 나보고 '잘생긴 걔 되게 잘웃던데?'라고 말했었음.)

내가 영어를 잘 못해서 스몰 톡조차 되지 않았고, T의 영어는 낮은 음에 악센트조차 없이 빨랐기에 처음엔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대화를 길게 하지 않았더니 나한텐 표정 없이 대했더랬다. 아마 본인을 싫어하는 줄 알았나 봐. 그러다가 T가 목감기 때문에 한동안 고생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K가 T에게 따뜻한 물 마셔야 된다고 계속 잔소리만 하고 있더랬다. 솔직히 나는 K가 T에게 이성적 호감을 느끼는듯해서 따뜻한 물을 챙겨줄 줄 알았는데 그냥 말만 하더라. 그때 내가 인지한 T의 성격은 고집이 있어서 갖다 주지 않으면 물 절대 안 마실 것 같은데 마시라고 계속 말만 하는 게 신기하긴 했다.

그래서 작은 컵에 물을 살짝 데워서 가져다주고 다시 일하러 바에서 나왔다. 처음엔 이게 뭔가 싶어 하더라. 그러더니 T 옆에 있던 K가 나보고 '이거 물 누구 거야?'하길래 'T 거야'라고 했더니 '얘 목 아파서? 물 마시라고?'라고 친절하게 내 짧은 영어를 대변해 주는 고마운 K ㅋㅋㅋㅋㅋ 그때부터 본인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는지 와서 장난도 치고 그러더라.

사실 점점 친해지기 시작한 건 그 이후 마감 시프트가 겹쳤을 때부터 였더랬다. 처음부터 T와 마감을 하는 게 편한 건 아니었다. T의 친구들이 마감 즈음 놀러와 술을 끊임없이 마시니 '본인이 마감해도 되니 너 일찍 가도 돼'라고 말하기도 하고(이때 얜 본인 친구들이랑 얘기하고 나 혼자 마감 다 했더니 그 이후로는 친구들 절대 안 데려옴. 내가 끝까지 다하고 갈 줄 몰랐겠지.), 내 할 일이 조금 남았어도 일찍 가고 싶으면 가도 된다고 하기도 했다. 뭐 사실 그래도 끝까지 마감하고 가긴 했음. 내 시프트가 'Bar Close'니까, 난 내 할 일을 끝까지 해야 하니까. 그리고 예전부터 마감 누가 했냐는 소리 듣는 걸 너무 싫어해서 내가 끝까지 마무리 짓고 가는 게 몸에 배어있기도 하고.

지금 생각하면 T에게 이성적인 기대감 말고 인간적인 기대감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많이 없었던 듯하네 진짜. 어차피 너도 나에게 인간적으로 기대 안 할 거 아니까,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했던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음. 근데 난 한국인이야.. 나 성격상 적어도 내 시프트 다 끝내고 가야 해.. 그러다가 너 왜 이렇게 나한테 이렇게 나이스하게 하냐고 장난으로 마감하는 날마다 말하더라ㅋㅋㅋㅋㅋ 한국인 정서상 간식 나눠먹는 게 습관이 돼서 마감 끝나고 킷캣 같은 거 나눠 줌. 근데 그럴 때마다 감동받은 리액션 해주는데 이 리액션 보는 재미가 있어서 요즘엔 매번 마감할 때마다 킷캣 먹이고 있는 중.

예전엔 T랑 일하는 게 좀 그랬는데 요즘엔 나도 T랑 일하는 게 재밌고 편하긴 함. 얜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뭐 나는 이렇다는 생각하고 있었음. 그러다 금요일에 나는 마감이고 얜 마감 아닌 날이 있었는데 마감으로 시프트가 바뀌었나 봄. 나한테 '너 오늘 마감이야?' 이러더라. 그래서 그렇다 했더니 '나도 오늘 마감이야. 나 너랑 마감하는 거 좋아!'이러고 감ㅋㅋㅋㅋㅋㅋㅋ 뭔가 귀여우면서 안쓰럽기도 했음. 마감같이하는 날마다 같이 집 가는데 건널목 신호 기다리면서 '다음 주에 봐!' 했더니 '너 내일 일해?' 이러더니 토요일에 매장 바쁘냐 물어보더라. 우리 매장은 주말엔 안 바쁜 편이라 주말이라 안 바쁠 것 같다 했더니 그럼 그날 술 마시러 갈 것 같다고 하더라 (우리 매장이 얘네 집 앞임). 아무래도 그날 본인이 소개해 준 친구가 매장에서 바텐더로 처음 일하는 날이라서 구경하러 오나 보다 싶었음.

호주는 대부분의 매장이 '해피아워'라는 이벤트를 하는데, 이때는 드링크 메뉴를 할인해 줌. 우리 매장은 3시부터 6시까진데 사실 이때 마시러 올 줄 알았음. 근데 안 오길래 '아 오늘 안 올 건가 보다 싶었음' 근데 느지막이 마감 때 다 돼서 이미 한잔 거하게 드시고 오신듯한 T가 걸어오는 게 보였음(우리 매장은 벽이 통유리임). 나랑 눈 마주치니까 윙크 한 번 해주고(여긴 본인이 친근하다 느끼는 사람들한테 윙크 많이 함) 매장으로 들어옴. 양쪽 볼이 이미 발그레해진 T 보니까 뭔가 웃겼음ㅋㅋㅋㅋㅋㅋㅋㅋ 이날 라니랑 T친구인 S, 그리고 T가 셋이서 바에서 수다 떠는데 나는 뭐 아직 셋이 수다 떠는 걸 들을만한 정도의 영어 리스닝 실력이 없기 때문에 그냥 서있었음. 물론 아예 안 들린 건 아니고 간간이 들을 수 있는 정도?

라니랑 이런저런 얘길 하면서 마감에 대한 얘길 하는듯했음. 근데 어제 마감 너무 늦게 했다고 제이슨(사장)이 T한테 뭐라 했나 봄. 라니(제이슨 와이프)가 그거 듣더니 '그 정도면 빠르게 잘한 거 아냐?'이렇게 말함ㅋㅋㅋㅋㅋ 아무래도 라니가 애들 얘길 들어주고 공감해 주면서 여기 스탭들을 케어하는구나 싶었음. 라니의 재발견. 그러면서 '쟤(나)는 나의 페이보릿이야'라고 말하더라. 그때 느꼈음. '아, 난 얘의 애착 인형 같은 존재구나'ㅋㅋㅋㅋㅋㅋㅋㅋㅋ

확실히 요즘 T의 웃음은 진짜 웃음이라는 게 느껴지긴 했음. 이렇게 난 이들의 애착 인형이 되어버렸다ㅋㅋㅋㅋㅋ 나한테 잘해주니까 나도 얘한테 잘하게 됨. 요즘 뭔 일인진 모르겠지만 기운이 없어 보이긴 하던데(마리가 요즘이 T에게 힘든 시기일 거라고 흘러가듯 말하긴 했음) 그래서 그런지 본인을 부정적인 단어로 많이 묘사하더라. 그래서 요즘 그럴 때마다 자존감 지킴이 해주는 중. 좋은 말 많이 듣다 보면 어느 순간 그 말들처럼 돼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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