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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으로서의 기록/2023 🇦🇺

🇦🇺이제는 각자의 길을 찾아

by 이 장르 2023. 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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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써 두고 나니 너무 감성적이긴 하네. 한 3개월 정도 지낸 것 같은데 벌써 이곳에서 지낸지 6개월째가 되었다. 외국인들과 함께 일한다는 게, 함께 놀러 다닌다는 게 때론 어색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이제는 너무 익숙하고 친근해졌다.

우린 어디로 가게 될까. 약속이라도 한 듯 함께 보단 따로, 각자에게 맞는 것을 찾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가 함께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실감하게 된다. 우린 함께여서 행복했지만 이곳을 떠나 각자의 새로운 공간에서의 삶을 꾸려나가겠지.

그러니 함께할 때 최선을 다해 시간을 채워나가보자. 이곳에서마저 일하느라 함께할 수 있던 시간들을 놓쳐버린 게 아쉬우니. 후회하지 않을 순 없으니 적은 후회를 남겨보자.

이곳에서 너무나 좋은 사람들을 만났더랬다. 그래서 이곳을 떠나는, 떠나야 하는 발걸음이 더욱 무거워지는지도 모르겠다. 과연 내가 이방인으로서 또다시 이렇게 좋은 사람들 속에 둘러싸여 살아갈 수 있을까.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또다시 0부터 시작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나를 툭툭 건드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렇게 나를 머뭇거리게 하는, 나로 하여금 이전의 상태를 유지하는 걸 고민하게 하는 것들이 사실 놓치지 말아야 하는 기회라는 것을 경험상으로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한동안 잊고 살았더랬다.

나 또한 캐나다행을 고민하고 있는 T가 본인을 위해 캐나다행을 결정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면서 정작 나는 같은 나라 안, 다른 지역을 가는 것조차 망설이고 있었네. 물론 T가 멜버른에 남아있게 된다면 나의 전시 준비가 좀 더 수월해지겠지. 하지만 T가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그리고 T의 삶에 있어서 새로운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의 새로운 경험을 위해 누군가의 기회를 지나치게끔 하는 것은 이기적인 게 아닐까.

요즘 마감을 끝내고 친구와 멜버른 곳곳을 걸어 다니고 있다. 새벽 두세시까지 한국이 아닌 곳을 걸어 다닌다는 게 미친 짓이라는 걸 알지만, 이곳을, 그리고 이 순간을 기억하기 위한 발악이라 해두자. 어제는 참 멀리까지 갔더랬다. 공동묘지 옆을 지나기도 하고, 관리 안 된 집들이 즐비해있던 길도 지나왔더랬다. 아무도 없던 고요한 거리가 스산하게 느껴지기까지 했지만 혼자가 아니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구나 생각하니 이 친구에게 고마웠다.

여느 때와 같이 함께 수다 떨다 걷다 보니 새벽 3시 즈음, 집에서 걸어서 한 시간 남짓한 거리를 둘러둘러 이곳에 도착했다. 멜버른 동물원이 있는 곳까진 왔다만 돌아가려면 한 시간을 걸어야 한다니 조금 아득해졌다. 처음으로 돌아가는 길에 트램을 타보기로 했고, 역시나 트램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눈앞에서 떠나는 트램을 바라보다 주눅 들어버린 그 친구를 다독이며 우리는 전기자전거를 타고 시티까지 가기로 했다.

새벽에 아무도 없는 차도 옆 자전거도로를 달리게 될 줄이야. 탁 트인 주변, 마치 촬영 세트장에 와있던 것처럼 그 어느 것도 시티로 향하는 우리를 방해하지 않았다. 기분이 너무나도 좋아졌다. 덥지도 그렇다고 차갑지도 않던 적당한 온도의 공기를 온몸으로 맞으며 시티로 향하는 그 15분 남짓한 시간이 오늘 일하면서 지쳤던 나의 마음을 다시금 생기 돋게 해주었다.

우리가 트램을 놓치지 않았더라면 경험할 수 없을 순간이었으리라. 뜻밖의 순간에 마주한, 아니 마주해야만 했던 경험들이 나를 더 행복하게 해줄지도 모른다. 그러니 실망하지 말자. 후회할 거라 지레 겁먹지 말자. 그렇게 우리는 또 다른 나를 발견해나갈 수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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