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컨을 따기 위해 케언즈로 온 지 벌써 100일이 넘었다. 다행히도 시간은 거의 다 채웠으며 5월 말까지 일을 하면 안정적으로 세컨을 딸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진다. 그러다 문득 멜버른에서도, 이곳에서도 운이 좋게 나름 워홀러 희망 편이라 자부했던 나의 생각이 하나의 자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지도 못한 한정된 시간을 마주한 나는 너무나도 당황스러웠다. 결정에 대한 결정을 위해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나는 결국 뜨는 해를 맞이할 때쯤에야 간신히 눈을 붙일 수 있었다. 당장 내일 일도 모른다던, 우리가 습관처럼 했던 말들이 또다시 나를 옥죄어올 줄이야.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급하게 어느 정도의 결정이 났고, 나는 이제 곧 멜버른으로 돌아간다. 막상 케언즈를 떠나려니 그동안 함께 일하면서 친해진 사람들, 그리고 이곳의 풍경이 하나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비 오는 날을 빼고선 감탄이 나오던 케언즈의 하늘은 아마 멜버른 가서도 그립겠지.
급하게 떠나기로 결정하고선 세컨일수를 빠듯하게 채워가는 나를 아쉬워해주던 당신들에게 고맙다. 멜버른에서 사람들과의 첫 이별로 힘들어하고 있을 때, 이곳에서 살아가려면 이별에 익숙해져야 한다며 나를 안아줬던 카롤리나의 말이 또다시 머릿속을 맴돌았다.
케언즈에서 발이 되어주었던 킥보드를 팔았다. 이곳에서의 짐을 하나하나 정리해나가며, 짐을 늘리지 않으려 모든 것을 최소한으로 유지했다 생각했던 나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곧 떠날 거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곳에서의 삶을 최소화했다고 생각했는데 4개월 남짓한 시간 동안을 보내며 내 곁에 남아준 것들이 나를 툭툭 건드렸다.
또 이별이구나. 이렇게 또다시 반복되는구나. 떠남을 예상하고 있었다지만 또다시 마주한 이별은 여전히 낯설었다. 나, 여전히 어른이 되기엔 멀었나 봐.
멜버른에서 살았던 곳의 집주인에게 다시 연락을 했다. 이만한 위치와 가격을 찾기 힘들기에 이곳으로 다시 돌아갈 거라 케언즈에 오기 전부터 집주인과 얘기를 해뒀더랬다. 함께했던 하우스메이트들이 멜버른으로 돌아오면 밤새 수다를 떨자며 연락을 해왔고, 수하물을 줄이기 위해 미리 보낸 짐 일부를 택배로 받아주기도 했다.
힘들기만 했던 케언즈에서 조금씩 적응해 가고 있었고, 이젠 마음 맞는 친구들까지 생겼는데 막상 떠나려니 조금은 머뭇거려지더라. 멜버른 때도 그곳에 적응하고 안정될 때 즈음 케언즈로 떠났는데 이곳에서도 그러는구나. 돌아가면 또 새로운 멜버른에서 적응할 때 즈음 한국으로 떠나게 될까.
인생이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오랜만에 받았다. 잊고 있던 삶의 방향성에 대해 다시금 돌아보게 되더라. 생각해 보니 요즘은 이런 생각들을 손놓은지 오래네. 인생이란 게 내가 생각했던 대로 결코 흘러가 주지 않는 걸 보니 우리네 워홀 생활과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호주에서 1년만 있다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던 처음 결심과는 다르게 세컨을 따고 있고, 더위가 싫어 선택했던 멜버른을 떠나 덥고 습한 케언즈에 와있는 걸 보면 말이다. 내가 생각하고 계획했던 것과는 대부분 다르게 흘러가며 그 흐름에 몸을 맡기다 보면 모르던 것, 잊고 있던 것들을 깨닫게 되고 또 다른 나 자신을 발견하기도 하더라. 어쩌면 워홀은 우리네 인생의 축소판이 아닐까 싶었다.
그렇게 미웠던 케언즈를 떠난다니.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왜 이리 아쉬움이 남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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