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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으로서의 기록/2023 🇦🇺

🇦🇺케언즈의 끄트머리에서

by 이 장르 2023. 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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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안 남은 출근길을 걸어가고 있다. 처음 왔을 때보다 시원해진 케언즈의 공기가 코끝을 스쳐가고 있다. 문 앞을 나서니 나를 맞이해주던 향은 청량한 하늘빛이었다. 이곳의 아침에 이런 느낌을 맞이하게 될 줄이야.

나의 시간이 케언즈의 끄트머리에 다다르고 있다. 나를 너무나도 힘들게 했던 이곳에 조금씩 적응해 나가는 걸 보니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구나. 거주지와 관광지 그 사이에 놓여있던 나의 케언즈는 지긋한 일상이 되기도, 또 익숙지 않은 것들을 하나씩 꺼내주기도 했다. 그렇게 건네받은 것들이 하나 둘 쌓여버렸구나. 너무나도 덥고 습해 햇빛을 피해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푹 숙이고 다녔던 처음과는 달리 선선해진 날씨에 여전히 따가운 햇살을 지금은 올려다볼 수 있게 됐으니.

하늘의 채도가 낮아지던 순간의 케언즈는 처음 이곳에서 겪어내야 했던 고생의 기억이 미화될 정도로 아름다웠다. 이제 정말 남지 않은 이곳에서의 시간이 아쉬운지 조금이라도 눈에 담아보기 위해 이곳저곳 다녀보려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이곳에도 정들었구나 싶었다.

세컨비자를 따내기 위함이 아니었다면 퀸즐랜드는 여행으로나 왔을법한 곳이었고, 그래봤자 브리즈 번쯤이나 다녀왔겠지. 그때까지 휴양지를 어떻게 즐겨야 하는지도 모르던 내가 브리즈번보다 북부에 있던 케언즈를 여행으로 오려 했을까. 그러고 보면 사람 일이란 게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오랜만에,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몇 년 만에 수영장에 몸을 담갔다. 어설프지만 수영을 다시 배워보려 했고, 귀에 물이 차오르는 느낌을 무서워하던 내가 바다 한가운데에서 스노클링을 넘어 스쿠버다이빙까지 해내게 될 줄이야. 하우스에서 생활하면서 전자레인지보다 오븐을 더 편하게 사용하게 될 줄이야. 살면서 운 좋게도 바퀴벌레 한번 본 적 없던 내가 이곳에서 엄지손가락 두 개만 한 크기의 바퀴벌레와 같은 화장실에서 샤워를 하게 될 줄이야. 일주일에 꼭 한 번은 바다 옆에 있던 공용 전기그릴에서 바비큐를 해 먹게 될 줄이야.

케언즈에서의 시간들이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럼에도 이곳에 와서 지낸 시간들을 후회하지 않는다. 방황과 고민들로 채워진 시간이 분명 있었지만, 우연히 이끌어준 이곳에서 우연히 마주한 이들과 상황들이 이곳에서의 시간들을 채워줬더랬다. 생각해 보면 도시생활에 익숙해진 내가, 트램은 찾아볼 수도 없으며 하루에 기차가 두 개밖에 다니지 않던 이곳에서, 버스 요금을 현금으로만 받던 이곳에서 또 어떻게 잘 살아냈구나.

익숙해질만하면 떠나게 되는 것이 워홀러들의 숙명이라지만 여전히 이별엔 익숙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잔인하게 다가왔다. 확실히 한국에서의 이별과는 다르다. 언젠가 다시 만나자는 말이 그저 허공에 흩뿌린 비눗방울 같은 거란 걸 우리 모두 알고 있기에 그런 걸까.

또다시 마주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하더라도 당신들의 삶을, 당신들의 선택을 응원하고 있다는 걸 기억해 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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