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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여운

영화 :: '니모를 찾아서(Finding Nemo)' 후기

by 이 장르 2020. 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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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외의 동반자

 

 

너무나 일찍 알아버린 세상, 그리고 그 세상으로부터 지켜내야 하는 존재. 그저 세상에게 다가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지켜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최선인 줄로만 알고 살아왔다. 하지만 지켜내려 하면 지켜내려 할수록 손에서 멀어져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세상의 이치였을까.

 

유감스럽게도 세상은 자신만의 흐름이 있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내가 간절히 원한다는 이유만으로는 절대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주는 우리가 무얼 간절히 원한다고 해서 발 벗고 나서 도와줄 만큼 여유롭지 않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무언가를 얻기 위해 그 과정을 열심히 수행해낸다 해서 원하는 결과를 얻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어떤 것이든 때가 있는 법이다. 충분한 경험과 결과를 위한 최소한의 능력이 갖춰졌을 때, 우연한 계기로 결과를 이루어내게 된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어른이 되어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어른이 되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나이만 먹을 뿐 결코 ‘어른’이 되지 못한다. 우리가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분명 견뎌내야 할 어떤 과정을 지나와야 한다. 그 과정에서 오는 고통을 두려워하기만 한다면 영원히 미성숙한 상태로 남을 수밖에 없다.

 

두려움은 그 어느 것도 보호해주지 않는다. 두려워하기만 한다는 것은 그 자리에 가라앉고 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두려움을 떨쳐내려 하기보다 두려움을 그 자체로 인정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사용될뻔했던 에너지를 새로운 도전에 대한 추진력으로 사용한다면, 훗날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어있지 않을까.

 

 

 

 

“고래가 우리더러 지느러미 놓으래. 모든 게 다 무사할 거야.”

“뭐로 장담해? 나쁜 일 안 생길지 어떻게 알아?”

“난들 어떻게 알겠어.”

 

 

 

 

 

 

- 인간 중심적 시각

 

 

누구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것인가. 니모를 위해 한다던 인간의 행동들은 근본적으로 누구를 위한 행동이었는가. 해초로부터 구해주었다는 것은 누구의 시선인가. 인간을 위한 해석인가, 당사자를 위한 해석인가.

 

인간은 고등동물이라는 사회적 통념이 있지만, 가끔 그것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타자에 대한 공감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들이 발견되곤 한다. 공감능력 또한 지능의 일부임이 이미 밝혀진 사실인데, 그렇다면 인간을 고등동물이라고 칭하는 것은 올바른 표현인가. 혹시 인간의 입맛에 맞는 부분만 골라 만들어낸 통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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