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일기를 써보려고 빈 화면을 띄웠다. 이상하게도 나는, 글을 쓸 때 종이에 적어 내려 가기보다 타자로 깜빡이는 커서를 밀어 글자를 하나하나 완성시키는 것을 더 선호하는듯하다. 글쎄, 내 생각을 바로바로 적어 내려 갈 수 있어서일까. 그런 것 같다, 아마도. 아날로그틱한 것을 좋아하지만, 펜촉의 움직임보다 커서의 깜빡임이 더 좋은 건 모순일까, 취향일까. 최근에 타자 소리가 유난히 많이 나는 키보드를 샀다. 나름의 아날로그 감성을 살려보고 싶었나 보다.
어쩌면 아무 일도 없는, 이 하루가 더 몽글몽글하게 다가올 때가 있다. 기억될만한 일들이 여기저기서 이벤트처럼 나타나는 것도 좋겠지만, 우리의 인생은 기본적으로 일상의 연속, 그러니까 우리가 익숙하게 느끼는 리듬 몇 구간의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그렇기에 가끔은 그 잔잔함이 문득 감사함으로 밀려오곤 하니까.
인생을 오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나이는 분명 아니지만, 평범하게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내 인생의 시그니처 구간을 지치지 않고 반복해나가는 것에 얼마나 많은 노력이 드는지, 새삼 느끼곤 한다. 다들 어떻게 그렇게 턱턱 해내는지. 나는 그 당연하다는 것들 하나하나 마주할 때마다 꾸준히 걸려 넘어지는데 말이야. 어쩌면 나에게 오늘 하루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은, 의미 있는 하루가 되었다는 뜻일 수도 있겠다.
날짜를 적어보다 문득 당연스레 적어냈던 그 숫자들이 낯설어졌다. 분명 살아가는 나날들이 모두 같을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렇기에 매일이 새로워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나 보다. 아마 나는 내 시간을 온전히 음미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 근래 무섭도록 쏟아지는 비를 타고, 나도 함께 쓸려내려 간 걸까.
고생했다. 무얼, 어떤 것을 고생했다고 명확히 말할 순 없지만, 참 고생했다. 매정한 시간은 우리가 고생을 하든 말든 또다시 우리를 내일로 끌고 가겠지. 하지만 너와 내가, 따로 또 같이 버티고 있다는 게, 나는 그게 참 좋은걸.
응원해 너를, 그리고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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