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정체성은 내가 쌓은 결론의 총합이라고 한다. 그렇기에 내 생각에 대한 결론을 많이 내려야 한다는데, 사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생각을 끝까지 이어가는 것, 에너지를 소모하며 지속적으로 생각을 이어나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기에 대부분은 생각 자체를 회피하거나 도중에 멈추는 경우가 많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구성원인 우리가 사유하는 것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듯하다. 사유를 방해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개개인의 정체성, 그리고 자아를 형성하지 못하게 막으려는 것이다. 모든 것은 공부라는 한 가지의 길로 통한다고 생각하도록 유도하면서, 성공이란 것은 세상에서 지정해주는 단 몇 가지 길만 있다고 한정 짓게 되는 획일주의에 중독되도록 유도한다는 것이다.
정체성의 결론은 본인이 어떤 삶을 살아야 되는가에 대한 내용이지만, 사회는 그것을 방해하며 가르쳐주지 않으려 한다. 사유하는 인간은 사회로부터 성가신 인간으로 분류되어버린다. 그들은 이방인의 시선으로 현상을 바라보기에 여러 가지 질문들을 하는데, 이러한 질문들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사실 대부분의 사회 구성원들이 이러한 질문에 대해 생각해본 적 없을뿐더러, 답을 찾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자신의 무사유에 대한 결과적 무지가 부끄러워, 구성원의 사유 자체를 거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모두가 그렇다면, 그것이 옳은것으로 되어버리는 세상이다. 사유하는 것을 성가신 것으로 여기는 다수가 사회에 존재하는 순간, 결과적으로는 사유할 수 없는 사회가 되어버린다. 인간과 짐승의 차이는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하던 사람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렇게 우리가 사유하는 것은 평범한 것이 아닌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어쩌면 마음 한편으로는 사유하는 사람들을 동경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사유의 근력이 없는 자신과 타인을 비교하면서 오는 괴리감에 그들을 짓이겨버리려 하는 것일 수도 있다.
행복은 생각보다 단순한 조건을 내밀고 있다. 나를 구체적으로 설명할 줄 아는가. 나를 알기 위해서는 사유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세상은 그것을 막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세상은 우리가 행복을 갈망하는 정도로만 살아가길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어른이 되어가면서 세계관을 확장시키곤 한다. 지금보다 어린 시절, 지금의 내가 사소하게 여기는 일로도 걸려 넘어져 한참 동안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지금은 비슷한 크기의 문제를 맞닥뜨리게 되면, 이전보다 담담하게 여기게 된다. 분명 비슷함에도 불구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러한 현상은 세계관 확장이라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세계관의 확장이 일어나면, 같은 크기의 일도 나의 세계관의 크기와 비교했을 때, 그 비율이 현저히 적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이전보다 담담하게 받아 들 일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결국 시간이 해결해준다는 말은, 시간이 지나 나의 세계관이 이전보다 크고 넓어졌기에 이전과 유사한 것을 맞이하게되더라도 이전보다 비중이 줄어들었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타인을 억압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세계관의 확장을 억압하면 된다. 세계관을 억압하면 자라나지 못한 세계관을 통해 세상을 보기 때문에, 작은 것에 쉽게 두려움을 느끼게 할 수 있다. 타인에게는 아무리 작은 문제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지니고 있는 세계관이 받아들이기에는 상당히 큰 일처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상호 간 작용하면 ’ 가스 라이팅‘의 형태가 되는 것이다.
’ 가스 라이팅’은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개인과 개인은 최소 단위일 뿐, 이것을 확장시키면 사회가 개인에게, 국가가 국가에게, 단체가 개인에게, 부모가 자식에게, 다시 말해 모든 경우에서 가능하다. 한쪽의 세계관이 억압을 받는다면, 그것은 결과적으로 그들의 세계관을 억압해 두려움으로 조종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세계관을 억압하는 것이 한 개인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 혹은 영향을 준다면 어느 정도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는 정확히 말할 순 없지만, 이러한 억압이 장기화된다면 누군가의 인생 전체를 뒤흔들어놓을 가능성도 분명히 있다.
세계관 억압을 외부에서 바라볼 경우, 너무나 분명하게 보인다. 하지만 억압을 하고, 억압을 받는 관계, 즉 억압의 당사자들은 이것이 세계관을 억압하는 행위인지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이러한 억압의 특징은, 억압에 어느 정도 익숙해질 경우 외부의 압력 없이 스스로를 억압한다는 것이다. 관성의 법칙처럼 억압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심지어 억압이 없는 상황을 불안해하기도 한다. 결국 이렇게 억압의 자동화 시스템이 탄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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