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잇값’을 해내는 것이 이전보다 더 퍽퍽해졌다. 노력 없이 얻어지는 숫자는 뭐가 그리 바쁜지. 꾸준히 늘어가는 숫자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정표 없는 갈래길을 수도 없이 선택해오면서도, 여전히 선택에 익숙해지지 않는 나 자신이 우습게 느껴지기도 한다.
게을러지고 싶다. 너무 빠른 속도에 멀미가 날 지경이다. 세상의 속도를 따라가다가 하나둘 나이를 따라가는 것을 보니 나도 불안함이 밀려온다. 기분 탓인 걸까, 아직은 세상의 속도를 따라가고 싶은데. 아니, 잠깐이라도 멈춰보고 싶은 걸까.
천천히, 혹은 쉬어가도 좋다고 말하는 책들이, 세상에 수없이 나오고 있다. 물론 나도 천천히, 음미하면서 가는 것을 좋아하지만, 나이에 맞는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은 천천히 할 수 없는 걸.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걸 알면서도, 타인이 가지고 있는 것, 누리고 있는 것들은 영원한 것처럼 느껴지곤 한다. 그렇다고 타인의 것이 영원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우러난 게 아니라는 생각에 씁쓸해지기도 한다. 이렇게 스스로를 갉아먹는다고 해서 배부른 것도 아닌데, 자꾸 어리석어지려 하는지 모르겠다.
이리저리 치여 찌그러지고 마모된 나의 그릇을 보니 확연히 줄어든 것이 보인다. 아마도 내가 돌볼 수 있는 나의 범위가 줄어들었다는 뜻이겠지. 그러면서도 가끔 회상하는 지난날 나의 모습에서, 마음에 들었던 부분을 가져와 꾸역꾸역 얹어보려는 내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인간은 내려놓는 것과 내려놓지 못하는걸 동시에 해내고 싶어 하는 모순적인 존재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어리석다. 하지만 어리석기에 해낼 수 있는 것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어리석게도, 꾸준히 지난날을 아름답게 꾸며대기에, 지금을 버텨낼 수 있는지도 모른다. 버텨내고 있는 현재 또한 미사여구를 붙일 수 있는 날이, 언젠간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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