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의 그리스 어원은 ‘상처’를 뜻한다.
우리는 각자의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간다. 트라우마가 사라지기 힘든 이유는 우리의 일상 속에서 트라우마를 꺼낼 수 있는, 어떠한 센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센서는 불시에 트라우마를 담아둔 문을 열어버린다. 그렇기에 우리는 다시 트라우마 속으로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센서를 근본적으로 제거하거나, 전혀 없는 곳으로 일상의 방향을 틀어야만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는 게 가능하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 쉽지 않은 과정이며, 인생 전반에 걸쳐 해결해내야 하는 미션과도 같다.
문득 억울하다는 생각이 스친다. 트라우마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은 대부분 피해를 받은 사람들이며, 트라우마와 관련된 사건을 의도하지 않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가해자들은 자신의 가해사실을 잊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더더욱 분노를 느끼게 된다. 분명 무언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는 관대해지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은 트라우마를 품고 살아가는 과거의 피해자에게, 시간이 해결해준다는 말로 나름의 위로를 건네곤 한다. 때로는 극복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나약하다며 질타를 하기도 한다. 각자의 사연은 각자만이 알고 있다. 극복이란 것이 누구나 가능하다면, 트라우마는 존재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같은 인간으로서, 인간이라면 겪을 수 있는 일들임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자신이 그러한 고통을 겪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앞으로도 자신에게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무의식 중에 쉽게 단정 지어버리게 된다.
공포란 것은 인간을 제약적인 환경에 몰아넣는다. 공포가 떠오를 수밖에 없는 환경, 공포스러운 기억에 대한 ‘트리거 포인트(Trigger point)’가 여전히 일상에 존재하는 이상, 트라우마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누구나 자신이 공포스러운 상황을 마주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충격적인 일들은 당연히 타인의 몫으로 여기며, 자신의 인생에서 평생을 걸쳐 자신을 괴롭게 만들 기억이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한다. 하지만 공포란 내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생각지도 못하게 마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예방할 수 있는 공포는 없다. 트라우마에 대한 극복을 피해자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은 분명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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