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비가 오고 있다. 얼마 전까지 지긋지긋했던 비는, 얼마 동안 보지 않았다고 색다르게 느껴지기도 하는 걸 보니, 사람이란 게 생각보다 변화에 쉽게 적응한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된다. 이제 얇은 옷에 카디건을 걸쳐 입을 수 있는 날씨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믿기지 않기도 하고, 믿고 싶지도 않고.
작년까지만 해도 겨울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올해는 차가워지고 있는 날씨를 따라 차가운 음료를 마시고 있노라면, 날씨와 내가 하나가 되는 기분이 든다. 하루하루가 쌓여갈수록 주변에 쉽게 동화되는 느낌이 좋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하고. 이제는 나다움을 지키기 위해 좀 더 노력을 들여야 할 것 같아서일까.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이, 한편으로는 이런 게 아닐까 싶다. 이전에는 노력 없이도 당연스레 얻어졌던 것들이, 하루하루를 쌓아갈수록 당연하지 않아 지는 것을 느낀다. 늘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았는데, 매일을 조심스레 쌓아가느라 소홀했던 것들이 문득 생각나 돌아보면, 이전과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알 수 없는 허전함을 느끼게 된다. 노력 없이 얻은 나의 시간을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어른이 되었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점점 움츠려 들어가는 것은 어쩔 수 없나보다.
하루하루의 무게가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기억나진 않지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기에 그런 것인지, 여기서부터가 인생을 시작하게 되는 것인지, 그도 아니면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이 이 시점부터이기에 그런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어, 가끔은 까마득한 두려움에 잡아먹히곤 한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나도 오늘이 처음이니까.
어쩌면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보다 조금 더 담담하게 오늘을 감당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다가도, 오늘을 살아가는 건 오늘의 나이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버텨내 보려 한다. 누구도 알려주지 않는 하루하루를, 담담하게 헤쳐나가고 있는 사람들이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문득 두려움이 들다가도, 그럭저럭 두려움과 잘 지내는 내 모습을 마주했을 땐, 또 그런대로 살아가고 있구나 싶기도 하고. 두려움을 극복하기보단 두려움에 의지하며 나아가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때면 나 스스로가 낯설기도 하고, 이제야 어른이 된 것 같기도 하고.
언제 이렇게 어른이 되어버린 걸까. 극복이란 게 부질없다고 느껴지는 순간들이 모여 어른이라는 곳으로 밀어버린 걸까. 그래도 이런 순간들을 잘 쌓아나가고 있다는 게, 가끔은 기특하기도 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거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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