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몇 번째 김지영인가. 혹은 몇 번째 김지영과 살고 있는가. 그도 아니면, 그동안 당신은 얼마나 많은 김지영을 만들어냈나. 혹은 그러한 행위에 동조하며 방관으로 일조했나.
논란의 도마에 수차례 얹혔던 ‘82년생 김지영’에 대해 궁금하기도 했고, 꽤 기대가 되기도 했다. 누군가에겐 환대, 또 다른 이에겐 질타를 받는 이 소설은 과연 어떤 소설일까.
관성의 법칙이라던가. 세상은 기존의 상태를 유지하려 하고, 변화를 유도하는 것들은 대부분 배척하려 하며 사회적으로 공개처형시키려는 것을, 우리는 역사 속에서 수없이 확인하곤 했다. 논란이라는 것은 의외로 세상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올 가능성이 높다. 이 소설은 어떤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까, 나도 모르는 사이 기대가 쌓여가고 있던 듯했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기 시작하면서, 꽤 많은 실망을 했다. 이 이야기의 장르는 분명 소설이라던데, 아무리 읽어봐도 픽션과는 거리가 멀었다. 에세이라는 장르가 더 걸맞을 것 같은데 말이지. 장르를 잘못 선택한 것인가, 아니면 출판 과정에서 누군가에 의해 장르가 바뀌어버린 것일까. 너무나 현실적인 이야기였기에 소설이라고 불리기엔 무리가 있었다. 아마도 장르를 분류하는 과정은 사람이 참여하는 것이니 어쩌다 나온 실수가 아닐까 싶기도 했다.
문득 이 이야기를 질타하는 사람들에 대해 본질적인 의문점을 갖기 시작했다. 그 어떤 장면에서도, 그들이 말하는 래디컬 페미니즘적 내용은 없었을뿐더러, 전체적으로는 주변에서 너무나 쉽게 접할 수 있는 80년 대생 여자들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아직 20대인 내가, 앞으로 30대가 되었을 때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되지 않을까, 혹은 이런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라고 걱정했던 언니들의 이야기였다. 단지 그들의 삶을 김지영이라는 익명으로 써 둔 것일 뿐. 온전히 여자의 이야기를 하는 것에서, 어느 부분이 남자의 권리를 침범하였다는 것인지 여러 번 보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가장 크게 들었던 의문은 이것이다. ‘그들은 이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해 본 적이 있는가’
그들이 이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았다고 가정을 해보자. 소설을 읽은 후 공감을 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이 주장하고 있는 것들과 이 이야기가 어떠한 연관을 지니고 있는 것인지, 더 나아가 그 연관성에서 파생된 그들의 의견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를 이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는지에 대한 의미에서 궁극적으로 그들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개인의 생각은 관여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타인에게 자신의 생각을 내세우기 위해서는 적절한 근거를 뒤에 붙여야 하는 것이 주장하는 사람, 혹은 자신의 의견에 타인의 동의를 구하는 사람으로서의 기본적인 의무인 것이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서, 이 이야기는 비단 80년생 여성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20대인 나를 포함하여 나의 주변 여성들은 김지영씨와 그 주변인들이 들었던, 무례한 말들을 한번쯤 들어보았을것이다. 불편하지만 차마 불쾌한 감정을 표현하지 못했던 그 말들이, 아직도 우리가 살아가고있는 세상에 떠돌아다니다 누군가의 입에서 입으로, 구전동화처럼 여성들에게 전해지고있는 것이다. 창작되는 모든 이야기들은 현실로부터 시작된다는 것, 다시말해, 현실에서 겪는 일들에서부터 영감을 받아 창작이 시작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 이야기가 질타를 받을만한 허구는 아니라는 결론을 낼수있다. 어쩌면 이것이 이야기의 본질이고, 근본이다. 우리가 비현실적이라고 말하는 판타지, SF 장르조차 현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결국 세상에 온전한 픽션은 없다.
당사자가 그렇게 느꼈다면 대부분 그것이 맞다는 것을 인정하자. 가해자는 자신이 했던 가해행위의 모든것을 세세하게 기억하지 못하지만, 피해자는 오랫동안 정확하게 기억한다. 어떤 사건에 있어 가해자와 피해자의 차이는, 그 일이 자신의 삶에 얼마나 크게 다가오는가가 아닐까 싶다. 시간이 해결해준다거나 시간이 지나면 괜찮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자신이 감당해내기에 버거운 고통을 마주한 피해자는 아직도 그 시간속에서 살아가고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당사자가 아닌 이상, 당사자를 대변할 권리는 없다. 아마 이 이야기 속의 김지영 씨도, 이 소설을 비난하는 누군가에게 자신을 대신하여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할 권리를 부여하진 않았을것이다. 세상의 모든 김지영씨는, 자신을 대변할만한 지성과 뒷받침할만한 근거를 지니고있다는 사실을 존중해야한다.
어느 분야든 기술은 발전하고 필요로 하는 물리적 노동력은 줄어들게 마련인데 유독 가사 노동에 대해서는 그걸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전업주부가 된 후, 김지영 씨는 ‘살림’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이중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때로는 ‘집에서 논다’고난도를 후려 깎고, 때로는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고 떠받들면서 좀처럼 비용으로 환산하려 하지 않는다. 값이 매겨지는 순간, 누군가는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겠지.
경험한 적 없고, 앞으로도 경험하지 않아도 되는 것에 대한 평가는 의외로 쉽게 결론지어진다. 전형적인 ‘남의 일’이라는 것은, 평가의 주체를 자처하는 당신의 마음을 편하게 할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일어날 일이 아니기에, 제 3자를 심판하는 심판자의 역할을 자처하며, 그러한 자신의 위치에 심취해있을수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가사에만 한정하여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기성세대가 현재의 2030세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기성세대에게 2030세대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있다. 부모와 선생님들은 세상 사람들 중 아이들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마주하고, 함께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많지만, 이러한 환경이 아이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과는 별개로 작용한다. 마찬가지로 아이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아이들을 함부로 평가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것은 아니다. 만약 이 모든 관계에서 자신에게 그러한 권한이 있다는 착각을 지니고 평가를 자행한다면, 그것은 타인을 존중하지않는 행위이며, 그자체로 권위주의적 행동이라는 것이다.
당신은 권한 없는 타인이 당신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을 즐겨듣는가. 당신이 행하려 하는 모든 선택에 대해 누군가가 자신의 의견을 강요한다면, 당신은 그것을 온전히 기쁘게 받아들일수있는가. 우리가 기억해야하는 것은, 당신이 어떤 선택을 하든 타인은 그 선택에 대하여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타인에게 이끌려 당신이 어떠한 선택을 하더라도 모든 책임은 결국 당신에게 돌아간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타의적인 삶을 원하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만약 당신이 그러한 삶을 원하지 않는다고 대답한다면, 어떤 이유로 여자들에게는 타의적인 삶을 함부로 강요하는가.
그런데 왜 어머니는 힘들다고 얘기하지 않았을까. 김지영 씨의 어머니뿐 아니라 이미 아이를 낳아 키워 본 친척들, 선배들, 친구들 중 누구도 정확한 정보를 주지 않았다. TV나 영화에는 예쁘고 귀여운 아이들만 나왔고, 어머니는 아름답다고 위대하다고만 했다. 물론 김지영 씨는 책임감을 가지고 최대한 아이를 잘 키울 것이다. 하지만 대견하다거나 위대하다거나 하는 말은 정말 듣기 싫었다. 그런 소리 들으면 힘들어하는 것조차 안 될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타의적인 삶을 강요하는 것은, 비단 성별의 문제가 아니다. 세상은 미디어에 비춰지는만큼 아름답지 않다. 이미 오래전부터 심리학계에서는 모성애(母性愛)라는 것이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다시 말해 모성애(母性愛)를 강요하는 행위는 세상에 존재하지않는 개념을 들이미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는 그러한 강요를 하는 사람이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는 꼴밖에 되지않는것이다. 사회가 모성애(母性愛)라고 포장하는 것은 단순히 인간과 인간 사이의 미운 정, 고운 정 그리고 책임감 등의 감정들이 합쳐져 형성된 복합적 감정이라는 것이다. 사회가 강요하는 모성애(母性愛)의 존재는 애초에 존재하지않는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산후우울증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맥락에서 산후우울증은 사회가 모성애를 강요하기때문에 발생되는 정신적 증상으로 볼수있다. 사회가 말하는대로 모성애(母性愛)가 선천적이라면, 산후우울증은 결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된다. 여성들은 모성애(母性愛)를 선천적으로 지니고 태어나기때문에 자신의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과 무조건적인 희생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모성애라는 것을 선천적인것으로 본다면, 여성이 태어날때부터 여성의 기본값으로 프로그래밍되어있다는 뜻이니 말이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인간, 즉 여자뿐만 아니라 남자들도 부모성애(父母性愛)라는 것이 선천적으로 프로그래밍되지않았다. 만약 부모성애(父母性愛)라는 것을 선천적과 후천적이라는 단어 중 굳이 선택해야한다면, 이것은 후천적으로 생겨난다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이다. 그렇기때문에 산후우울증이란, 사회에서 말하는 선천적 모성애(母性愛)의 형태를 자신이 지니고있지못한다는 자괴감에서 생겨나는 정신적 증상이라는 것이다. 후천적으로 형성되는 아이와의 정(情)은 그저 인간 대 인간으로 형성된 유대관계일 뿐인것이다.
부모성애(父母性愛)가 선천적이라면 우리는 반려동물을 내가낳은 자식처럼 키울 수 없다. 또한 아이를 입양을 하더라도 내가 낳은 아이처럼 사랑을 주며 키울 수 없다. 왜냐하면 부모성애(父母性愛)는 선천적인 것이기 때문에 직접 낳은 아이에게만 적용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반려동물을 자식처럼 키우기도 하고, 아이를 입양하여 사랑을 듬뿍 주어 키우기도 한다. 반대로 자신이 낳은 아이를 학대하기도 하고, 버리기도 한다. 이것은 부모성애(父母性愛)는 선천적으로 지니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근거가 된다.
결과적으로 부모성애(父母性愛)를 강요하는 행위는 폭력적이고 무지한 행위라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무지하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이러한 문제에 대해 얼마나 관심을 가지지 않았는지, '아름답다'는 말로 얼마나 긴 시간 동안 이러한 사회적 폭력을 묵인하려했는지 알 수 있다. 세상이 이상해진것이 아니라, 언젠가 터질 것이 터진 것뿐이다. 그 시기가 단지 지금일 뿐. 훗날 우리는 이러한 것을 당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지난날 우리가 지녔던 사회적 무지에 대하여 부끄러워하고있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우리가 과거를 바라볼 때 부끄러운 지점을 발견할수있는것처럼.
세상은 나날이 좀더 나은 방향을 향해가고 있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앞으로 더 나은 세상이 될 것이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말일수도있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지난날과 비교했을때 더 나아졌다는 것에 위안을 삼으며 불편에 묵인하고 견뎌야 할 의무는 없다. 우리는 현재에 태어났고, 현재를 살아가고있기에, 굳이 과거에 비교하며 현재의 상태에 대한 위안을 얻을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우리는 현재를 살아야 한다. 과거에 대한 집착과 미련을 버려야 더 나은 미래를 맞이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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