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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관하여

읽기 좋은 책 :: '오래된 미래' 후기

by 이 장르 2020. 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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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이 아닌 자립. 자신의 전통을 지키는 자들의 자부심.

 

문명화는 사람들을 줄 세워 불안 속으로 밀어 넣는다. 겉보기에는 그들의 삶을 더 풍요롭고 여유 있게 만들어주는 듯하지만 그 안으로 들어가 본다면 아무것도 남지 않은 듯한, 두려움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문명은 나이 먹는 것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기보단 두려운 것, 부정적인 것으로 여기게끔, 감정을 심어놓는다. 분명 나이에서 파생되는, 시간 이주는 깊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이 듦을 병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것을 보면 ‘트렌드’, ‘안티에이징’ 등에 집착하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트렌드‘는 주 소비층의 소비 흐름을 말하며, 소비는 경제활동 가능 인구가 주로 하게 된다. 그리고 그 경제활동인구는 대부분 젊은 세대가 차지한다는 것. 중, 노년층은 ’ 트렌드‘와 멀어진, 고집 있고 느린 사람들이라는 생각에 그들의 모든 것을 가벼이 여겨버린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가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소외되는 것이 두려운, 그들의 불안감이 나이 들지 않는 것에 대한 집착으로 어그러졌다.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릴 만큼 급속도로 성장을 해 온 우리 또한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전쟁으로 최빈국이었던 나라가 오늘날의 대한민국의 모습을 하기까지 67년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무엇이든 빠르게 진행되는 것은 문제를 야기하기 마련이다. 이렇게 ‘이루어 낸 ‘ 발전의 속도를, 우리의 의식이 발맞춰 따라오기엔 무리가 있었나 보다. 우리는 스스로의 문화를 부정하고, 부끄러워하며 감추기 바빴고 서열화했으며, 심지어는 열등하다는 프레임을 씌우기까지 했다.

 

아름답다고 세뇌당한 타국의 것에 대한 무비판적인 수용은 우리가 발전하는 내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들의 문화는 우월한 것, 우리의 문화는 열등한 것이라는 인식이 사람들의 무의식 중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부끄럽지만 나 또한 한국사를 공부하기 전까지는 우리나라의 문화를 그저 ’ 철 지난 장신구‘ 따위로 여겼었다.

하지만 한국사를 공부하다 보면 우리나라가 어떻게 지금까지 지켜져 왔는지, 얼마나 많은 지혜들을 삶의 구석구석에 녹여냈는지, 깨어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지 알게 되니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결국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역사를 외면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거만한 말을 타고 왕처럼 날아다니며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새들도 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걸까?

여행객들에게 분개하며, 1980

타시 라브 기아스

 

 

세상은 뜻하지 않게 우리의 편견을 뒤집을 수 있는 기회를 던져주곤 한다. 그 기회는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모습보다는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드는 모습을 띄고 있는 경우가 많다.

 

최근에 가장 큰 사회적 이슈가 된 ‘COVID-19’가 그것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우리가 백 년 전만 해도 ‘열강’이라 칭해졌던 나라들의 민낯을, 전 세계가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다. 그들의 가치는 현재 진행형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그들은 철저히 이기적이었으며 우월주의에 빠져 다른 민족을 처참하게 짓이기며 살아왔다. 그것이 그들의 삶의 방식이었고, 방식이다. 하지만 미래에도 그것이 가능할지는 미지수다.

 

우리는 분명 현재에 살고 있다. 우리의 시제는 현재이다. 과거를 팔아 현재를 연명하는 국가들을 우러러볼 필요가 있을까. 그들은 이제 화려하게 비치는 과거를 전시하는 전시장쯤으로 전락해버렸다. 그들은 부끄럽다고 하면서도 부끄러운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부끄러운 것을 알지만 그것을 멈추지 않는다는 것은, 진정 부끄럽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다는 것일까, 아니면 부끄럽다는 개념이 지역마다 다른 기준으로 이해되는 단어라는 걸까.

 

결국 그들은, 노략질로 발전을 이뤄낸 국가의 습성을 버리지 못했다는 비판을 피해갈 수없게 되었다.

 

 

나는 어느 마을에서 카메라와 사탕과자와 펜으로 무장한 한 무리의 여행자들이 주민들을 공격하는 모습을 보았다. 초록색, 빨간색, 파란색으로 휘황찬란하게 차려입은 그들은 순진한 마을 사람들의 얼굴에 한마디 말도 없이 카메라를 들이대더니 또 다른 희생자를 찾아 나섰다.

분노한 관광객, 1999

 

책을 읽던 도중, 문득 ‘라다크’의 모습이 궁금해졌다. 네이버에 검색해본 라다크 레의 모습은, 책에서 라다크의 전통 모습이 사라지고 있다고 표현했음에도 불구하고 여행자의 입장에서 볼 때에 충분히 매력 있는 여행지였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책에서 읽었던 라다크의 모습과 달리 화려한 숙소들이 꽤 많았다는 것이다. 어울리지 않는 요소들의 조합인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그들의 ‘발전되지 않은’ 문화를 구경하러 몰린 구경꾼들의 흔적일 것이다. 또한 여행자라고 칭하고, 칭해지는 그들은, 라다크의 사람들이 포함되어있는 라다크의 풍경을 카메라로 맘껏 담아냈을게 분명하다. 그들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인격체가 아닌, 풍경의 일부로 소비한 것이다. 이것은 분명 수직적 폭력이다.

 

 

서구에서 이 ’ 검약‘이라는 말은 대개 자물쇠가 채워진 음식 창고를 지키는 나이 든 아주머니를 연상시키지만,
이 곳 라디크에서는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 그것은 풍요의 기본이 된다. 한정된 자원을 조심스럽게 아껴 쓴다는 것은 인색함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아주 적은 것에서 더 많은 것을 얻는다는 것. 바로 그것이 ’ 검약‘의 본래 의미라 할 수 있다.

 

 

서구의 검약이 재물을 쌓아두고 자물쇠를 걸어 잠그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탐욕이라 정정해야 한다. 많은 것을 한 곳으로 모으는 것과 하나를 많은 곳으로 퍼뜨리는 것. 차이가 분명한 두 개념이 하나의 단어로 뭉뚱그려진다면, 역설적이게도 그 의미가 사라지게 될 테니까. 내가 아는 ‘검약’이 긍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면, 더 이상 이러한 의미로 소비되지 않아야 한다.

 

 

질병이란 이해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다.

라다크의 암치(의사)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 위에선, 질병과 치료법은 공식화되어있다. 서양 의학은 사람을 인격체로 여기기보다, 수많은 세포 중 하나쯤으로 취급하곤 한다. 임상 단백질 덩어리, 딱 그 정도.

 

물론 요즘에는 환자와의 ‘라포 형성’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곤 하지만 학문의 특성 자체가 저렇게 생겨먹은 것을 어찌하겠는가. ‘라포 형성‘을 필요로 하는 이유 또한 환자가 다시 방문을 하게끔 유도하여 경과를 지켜보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언뜻 보면 환자를 위한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는 다양한 임상을 확인하기 위함이라니. 결국 서양의학은 철저하게 자신들의 이기심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만족이라는 것은 자신이 삶의 흐름에 있어 한 부분이 된다는 것을 느끼고 이해하면서 그것과 함께 여유롭게 흘러가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긴 여행을 떠나려는 순간 비가 쏟아진다 해도 굳이 참담한 느낌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당신이 그런 것을 좋아하지는 않겠지만 라다크 사람들은 그런 경우 ’ 굳이 불행하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지요 ‘라는 반응을 보이리라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부끄러웠다. 블로그에 대만 여행기를 써 내려가며 ‘여행지에서, 아침에 흐린 날씨를 맞이한다고 해서 우울하거나 서운하진 않다. 흐린 순간 뒤엔 언제나 맑은 순간이 기다리고 있고, 만약 그렇지 못하다 하더라도 다음에 다시 이곳에 올 구실이 생긴 거니까.‘라고 적어두고는 스스로 문장에 심취해있었던 기억이 난다. 돌이켜보니 내가 한 것은 그저, 정신승리의 한 종류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여행지의 흐린 날이 어떻게 신경 쓰이지 않을 수 있을까. 돈과 시간을 들여 떠나온 여행이다. 그 순간을 두고두고 간직하기 위해 사진을 찍을 때면, 흐린 날씨는 사진 찍을 의지를 쉽게 꺾어버리곤 하니. 날씨 따위에 휘둘리는 나의 모습이 처량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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