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글노트/생각노트

한정(限定)의 비애

by 이 장르 2020. 12. 29.
728x90
반응형

 

 

 

 

 

 

물리학이 적용된 부분에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하지만 물리만큼 세상에 쉽게 적용되는 것이 또 있을까 싶기도 하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물리학의 몇 가지 법칙만 보아도 인간과 인간 사이에 충분히 적용할 수 있을법한 법칙들이 대부분이다. 인간은 인간임과 동시에 지구의 입장에서 볼 때는 하나의 물체라는 관점으로 본다면, 오래전 세상의 지식을 대표했던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 여러 가지 학문에서 동시에 작용할 수 있었는지 어렴풋이 짐작해 볼 수 있다.

사실 물리라는 것은, 기존에 없던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학문이 아니라, 이미 우리 주변에 만연히 널려있는 자연 현상들을 단지 인간이 인간에게 설명하기 위한 학문일 뿐이다. 다시 말해, 자연의 언어를 인간의 언어로 바꾸는, 일종의 통역학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렵게 느껴진 것이 실제로 맞닥뜨려보면 사실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다. 물리학 또한 우리가 이미 태어날 때부터 경험적으로 알고 있던 것들을 공식 따위로 가시화 시켜 두었을 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어쩌면 두려움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 삶은 인간에게 두려움을 두려움으로만 남겨둘 수 없게끔, 용기라는 것을 끊임없이 강제한다. 이러한 요구에 선택지가 주어지는 경우도 간혹 있지만, 대부분이 그렇지 않다. 다시 말해, 두 가지 이상의 선택지를 부여하는듯하지만, 대부분 나에게 주어진, 공식적인 선택지에선 용기를 내는 방향으로 선택을 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우리는 용기에 대해서도 강요받는다. 용기를 내지 않을 권리는 우리에겐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내 용기조차 내가 원하는 곳에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바라오던 삶이었을까.

세상은 우리가 한정된 자원에서 한정된 사고에 갇혀있으면서도 무한한 결과를 만들어내길 바란다. 사회의 모순적인 요구 사항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만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 한정과 무한정이 공존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은 우리에게 혼란을 주기엔 너무나 충분한 조건을 지니고 있다. 두 가지의 상반된 요소가 주는 괴리감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어찌 혼란스러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사회는 영원히 해결하지 못할 과제를 던져주고는 빠른 시일 내에 해결해내길 강요한다. 어린 시절부터 한정 지어 자라온 개인이, 어느 순간 어른이라는 호칭을 받아들어 한정의 틀에서 깨어날 수 있다는 기대를 품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그러니 우리가 한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결코 개인 탓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를 쉽사리 한정 지어버린 사회가, 후에 개인을 책임지려할까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된다.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개인은 한정의 틀에 끼워두더라도, 개인의 개인은 한정의 틀에서 빠져나왔으면 한다. 다시 말해, 사회에서의 개인과 개인의 개인을 분리하여 살아가는 시도를 꾸준히 했으면 한다는 말이다. 이왕이면 나의, 모두의 세상이 지금보다 마음껏 넓힐 수 있는 환경에 자신을 담았으면 한다. 우리가 하루의 오랜 시간을 머물러야 하는 직장, 학교, 집이 나 그리고 당신의 세상에서 전부가 아니었으면 한다. 아무리 직장, 학교, 집 등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다 하더라도, 그곳은 단지 나의 일부로만 남겨두길 바란다. 부디 스스로에 대한 주도권을 내어주지 말았으면 한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