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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좋은 책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후기

by 이 장르 2021. 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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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평범성. 악한 행위가 평범한 것인가, 평범한 것이 악해진 것인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인간은 인간들 속에 파묻혀 살아가고 있으며, 때로는 개개인의 가치관보다 집단의 가치관을 우선적으로 적용하고, 사유의 정도와는 상관없는 결과를 도출해낸다. 개인의 가치관과 집단의 가치관이 충돌할 경우, 그에 대한 혼란과 거부반응이 함께 생겨나는데, 이러한 상황이 장기간 지속되거나, 지속될 것이라 인지를 한다면, 개인은 충돌 대한 스트레스를 최소화하기 위해 개인의 가치관을 외면하게 된다.

사회는 개개인을 자유로이 조종할 수 있길 바란다. 마치 체스판에 올려진 말과 같이, 사회에서 부여한 위치에서, 사회의 지시대로 움직이며, 극단적으로는 사회를 위해 희생까지 하기를 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적 측면에서 인간의 개인적 사유를 막아야 한다. 사회는 미디어, 교육 등 다양한 방법으로 사유하지 않는 방법을 인간에게 학습시킨다. 다시 말해 사유하지 않아도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불편한 점이 없다는 것을 꾸준히 학습시키고, 인간이 사유하려는 에너지를 다른 방향으로 분산시키기 위해 다양한 매체를 내놓는다.

인간의 도덕이란,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인간의 선천적 악함이 나오려 할 때 제지시켜주는 요소로써, 집단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나치의 가치관은 인간 개인으로서 독자적으로 품기에는 비윤리적인 측면이 강했다.

인간은 간혹 누군가에게 연민을 느끼긴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나타나는 공감 행위일 뿐이다. 혹은 타인의 고통을 관망하고 은연중 자신의 상황과 비교를 하며, 스스로를 위안하는 도구로 이용하곤 한다.

사유를 하지 않는 인간의 세상은 확장될 수 없다. 사유의 부재는 인간을 주체 없는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다시 말해 인간이 스스로에 대한 주체성을 지니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사유를 실행하여야 하는데, 그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다. 사유의 과정은 세상을 확장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생각지도 못한 부분의 사유를 마주해야 하기도 하고, 때로는 내가 해왔던 사유와 반대되는 세상을 마주해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모든 사유에는 각자의 이유가 존재한다. 사유의 핵심은 내용에 표면적으로 드러나있지 않기 때문에 짚어내는 과정 자체가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유들이 쌓여 온전한 나만의 사유, 내가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가장 인간적일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주게 된다.

아이히만은 외부의 압력, 즉 히틀러의 독재에 동참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자신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요구에 따랐으며, 한편으로는 히틀러의 광기에 따른 대가로 얻은 권력을 만끽하기도 했다. 인간이 윤리적으로 어긋난 행위를 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사유하는 행위를 멈춰야 한다. 나치 추종자들은 그들의 개인적 사유를 멈췄다. 유대인들을 차별하고, 최종적으로 그들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사유를 멈춰야 죄책감에 무뎌질 수 있었다. 그들에게 유대인이란 목적을 이뤄낼 대상일 뿐, 동등한 인격체가 아니었다.

문명화된 나라들의 법에서는 비록 인간의 자연적 욕구와 성향이 때떄로 살인의 충동이라 하더라도 양심의 소리는 모든 사람들이게 "살인 하지 말라"고 말한다고 추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히틀러의 땅의 법은 비록 살인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정상적인 욕구와 성향에 반한다는 것을 대량학살 조직자가 아주 잘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양심의 소리가 모든 사람에게 "너는 살인할 지어다"라고 말하기를 요구한다. 제3제국의 악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악을 인식하게 되는 특질을 상실했다. 수많은 독일인들과 많은 나치스, 아마도 엄청난 수의 그들은 살인을 하지 않으려는, 도둑질하지 않으려는 , 그들의 이웃이 죽음의 길로 가지 않도록 하려는, 그리고 그들로부터 이익을 취함으로써 이 모든 범죄의 공범자가 되지 않으려는 유혹을 분명히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맙소사, 그들은 그러한 유혹에 어떻게 저항하는지를 배워버렸다.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사실 유대인에 대한 증오는 나치에 의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열등감에 의해 자리 잡은 유대인에 대한 편견이, 유대인이 살아가는 터전에서 만연히 퍼져있었고, 히틀러의 광기는 단지 이러한 증오를 한곳으로 모아 터뜨리는데 사용되었을 뿐이다. 히틀러는 자신의 욕망을 이뤄내기 위해, 단지 대부분의 독일인, 그리고 전쟁으로 인한 분노가 가시지 않은 인간들의 욕구를 잘 파악하고 이용했을 뿐이다.

나치가 유대인들을 학살하게 된 원인은 그들의 분노였다. 전쟁 그리고 황폐한 경제환경 속에서, 인간은 사유하는 법을 잊기에 충분했다. 나치는 독일인들의 폭발하는 감정을 해소할 탈출구를 찾아야만 했고, 그렇게 찾은 표적이 유대인이었던 것이다. 열등감은 이렇게 그들이 사유하기에 어려운 환경에서부터 비롯되었다. 물론 이로인한 나치와 나치 추종자들의 행위를 합리화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그들의 가치관은 국수주의를 만들어냈다. 독일뿐만 아니라 나치와 협력했던 다른 국가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독일의 뛰어난 유대인 학살 시스템에 감탄하며, 자신의 국가에서도 유대인들을 제거해 주길 바랐다. 그들의 국가는 그들 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나치와 마찬가지로 편협하고 지독한 민족주의를 선택하였다.

학살에 침묵한, 나치에 묵인한 인간은 모두 공범이다. 그들은 침묵으로 그들 고유의 위치를 지킬 수 있었다. 아니, 어쩌면 침묵으로 인해 유대인을 즈려밟고 올라가 권력을 얻었다. 아이히만은 그러한 사람들을 상징하는 인물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가능성을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된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이미 아이히만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다수가 아니라는 이유로 방관하고 있는 차별, 폭력 등에 대해, 우리는 누군가의 아이히만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사회에서의 인정을 받기 위해 수많은 인격체를 희생시키고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해왔던 행위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 재판에서 환경이 자신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말을 수없이 되뇌었던 점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조금 늦었군요, 신사 여러분들.

모든 것이 잘 돌아가는 듯이 보였을 때 독일의 최고 파괴자를 만들고

그를 추종한 사람들은 당신들이었죠.

....

당신들에게 요구한 맹세를 주저 없이 하고,

수십만 명을 살해하고 전 세계의 비탄과 저주를 짊어진 이 범죄자의

비열한 똘마니로 자신을 만들어버린

.....

사람들은 당신들이었죠. 이제 당신은 그를 배신했군요.

......

지금, 파산을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이때,

스스로를 위한 정치적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그들은 파산해 가는 집을 배반하는구나.

자신의 권력 추구의 길에 방해가 된 모든 것들을 배신한

바로 그 사람들이.

- 레크말레체벤 「절망 속의 한 인간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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