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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기록/2019 유럽 🇫🇷🇨🇭🇦🇹🇨🇿🇭🇺

유럽 1-0. 프랑스 파리 France Paris🇫🇷

by 이 장르 2021.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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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르르륵, 드르륵. 잠이 덜 깬 상태로 눈을 뜬 건지 감은 건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현관문을 나섰다. 내가 캐리어를 끄는 건지, 캐리어에 밀려가는 건지 애매할 정도로 비몽사몽 한 모습이었다. 밤을 새우고 비행기에서 숙면을 취하겠다던 그 패기 넘치던 모습은 어디로 간 건지, 짐 싸면서 같이 넣어버린 건가 싶을 정도다. 3월임에도 불구하고 미련남은 겨울의 추위가 가시질 않았는지 아직은 으슬댈정도의 추위가 새벽과 아침 그 사이에 머물러있었다.

 

몇 년 만에 해외를 가는 딸이 꽤나 걱정되었는지 새벽부터 일어나 내가 짐 싸는 걸 지켜보고 있던 엄마가 공항버스를 타고 가는 나를 또다시 걱정스럽게 지켜보고 있었다. 27살이나 먹은 성인을 걱정하는건 이 세상에 엄마뿐일지도 모른다. 살짝 귀찮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런대로 고마운 마음이라고 여기기로 했다.

 

얼마만의 공항버스를 타보는건지 모르겠다. 적어도 10년은 넘었을 거라는 생각이 스치면서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시외버스로 통학하던 시절, 왕복 다섯 시간을 버스로 오갔던 그때 그 기분이 들었다. 지루하지도, 설레지도 않은 딱 그런 감정으로 창밖을 바라보며 공항으로 향했다. 밖은 점점 밝아져 왔다. 공항에 도착할 때 즈음 창밖이 밝아졌다. 버스를 탈 때 즈음엔 형태만 희미하게 보였던 사람들의 채도가 선명해졌다.

 

이 시기의 한국은 미세먼지가 한창 흩날리던 때였다. 어느 정도였냐면 어떤 날은 미세먼지가 너무 심해서 옅은 안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인천공항에 다다를수록 회색빛은 짙어졌다. 공항 근처는 사람이 살기엔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드디어

한 시간 반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인천공항 제2터미널이 보이기 시작했다.

 

'와, 진짜 크다.'

 

촌사람이 따로 없었다. 그럴만도한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비행기를 탄 것이 2012년 2월이었고, 제2터미널도 아니었다. 뉴스에서 크다는 말만 들었지, 이렇게 실제로 어느 정도의 크기인지 경험해볼 일은 없었다. 나에게는 그저 막연한 크기였다.

공항이란 곳이 오랫동안 와보지 않았던 동안에 이렇게나 많이 바뀌었다. 내가 알지 못한다 해서 멈춰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또 한 번 느끼게 되는 순간이었다.

지이잉. 비행기라는 한 공간안에서 열 시간 남 짓을 함께 보내게 될 사람들의 연락이다. 물론 각자의 자리는 멀찍이 떨어져 있다고 하지만 비행기를 타기 전, 그리고 그곳에서 내려 파리 공항이라는 미지의 장소를 함께 탐험하게 될 사람들이기도 하다.

 

"희씨 어디세요?"

"저는 여기 하나은행 앞이요. 란씨는 어디세요?"

 

여전히 카카오톡에 뜬 서로의 이름만 알고 있어 호칭 또한 어색할 뿐이다. 어릴 때는 이름 뒤에 '씨'를 붙여 부르는 것에 굉장한 거부감을 느끼고 있어 그 당시에 어른이라고 칭했던 사람들이 이러한 호칭을 사용할 때면, 어른이란 게 뭔가 다르긴 하구나 싶었더랬다. 그런데 여전히 어른이라고 불리우는 나이에도 이런 호칭은 익숙해지지 않는 걸 보니, 그때 내가 어른이라 생각했던 사람들도 사실 이러한 호칭을 쓰는 데에 어색했지만 단지그 걸 티 내지 않았던 것뿐이구나 싶었다. 나이가 하나하나 쌓여간다 해도 같은 사람이었다.

란 언니는 좀 있다 도착한다 해서 희 언니와 먼저 만나고 있기로 했다. 출국 전 모임에서 토끼눈을 하고 있던 언니는 여전히 공항터미널 한복판에서 토끼눈으로 나를 맞이했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언니의 눈이 빨갛다는 것 정도가 아닐까. 밤을 새우고 비행기를 타려던 나의 계획이 처참히 흩어져버린걸 희 언니에게 말했다. 어색했지만 어색함을 깨기 위해서 아무 말이나 시작해야 했고, 그 주제로 이만한 게 없었다. 언니는 나의 실패와 상반되는 결과를 얻은듯했다. 밤새는 데에 성공을 했고, 그렇기에 지금은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는 말을 했다. 사실 이 얘기를 듣지 않아도 그런 것 같은 상태였다.

 

빨리 비행기에 타서 잠들었으면 좋겠다는 언니의 말을 듣고 내심 부럽기도 했다. 한번 잠에서 깨면 피곤해도 밤이 될 때까지 쉽게 잠들지 못하는 나와는 다른 세계의 이야기였다. 혼자 무언가를 하면서 잠을 이겨내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자지 않았냐 물어보니 그냥 얼버무리려는 언니의 모습을 보고 다른 주제를 던져 이런저런 이야기를 간간히 해나갔다. 여행을 함께 다니며 친해진 후에 밤을 새우는 비법에 대해 듣게 되었는데, 희 언니는 출국 전날 새벽까지 사람들과 술을 마셨단다. 술 취한 상태로 새벽에 돌아와 캐리어에 짐을 욱여넣고는 그 상태에서 대충 준비해 공항으로 온 것이다.여행 내내 매일같이 술자리를 만들어내는 언니를 보고 나니 이 언니의 체력이면 충분히 가능할법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간단히 체크인을 마치고 환전한 돈을 찾아 넣고, 통신사 쪽에 가서 멀티 어댑터를 대여했다. 한 것도 없는 듯했는데 벌써 한 시간이나 지나있었다. 빠진 것이 있나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에 같은 비행기를 탄다는 남자애의 라운지 인증샷이 단톡에 올라왔다. 라운지? 공항이란 곳에 와본지 10년 만인 내가 라운지에 대해 알턱이 없었다. 게다가 아까도 말했다시피 2 터미널과는 초면이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모르면 용감하다고, 희 언니와 나는, 우리도 라운지에 들어가 보자며 당당하게 대한항공 라운지로 향했다. 역시나 입구에서 들어가지 못했다. 여행을 많이 다녀본 지금은 왜 그런지 알지만, 그 당시에만 해도 왜 안 되는 건지 몰랐었다. 그놈의 모닝캄이 뭔지. 라운지 데스크 직원분께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읊어주었지만 뭐가 뭔지 알 수 없어 그냥 고개만 꾸벅이고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라운지 들어가는 건 포기하고 일단 밥이나 먹기로 했다. 우리는 어색한 거리를 유지하며 푸드코트로 향했다. 사실 여기서 밥을 먹으면 체할까 걱정되기도 했지만 이미 라운지에서 무언가를 먹으며 쉴 생각에 가득 찼던 우리는 거절당한 지금 뭐라도 속으로 밀어 넣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메뉴판에 나와있는 여러 가지 메뉴들 중에 가장 무난한 메뉴 두 개를 주문했다.

 

창가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창밖으로는 비행기들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걸 구경할 수 있었다. 시답잖은 이야기로 대화를 이어가며 밥을 먹었다. 애매하게 시간이 남아 공항 면세점을 이리저리 구경하며 돌아다니다가 우리가 비행기를 탈 259번 게이트 쪽으로 향했다. 의자에 함께 앉아있던 희 언니가 갑자기 가방을 뒤적이더니 비행기 티켓을 꺼내 들었다. 이 여행 때문에 인스타를 시작했다는 언니는, 다른 사람들이 여행 갈 때마다 비행기 티켓을 찍어 올린다며 핸드폰 카메라를 켰다.

 

"저도 찍을래요, 언니."

 

나도 여행 가는 거 자랑할래. 인스타에 사진을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알람이 우수수 쏟아졌다. 얼마 전까진 수험생이라, 또 그 이후엔 딱히 올릴만한 게 없어 인스타에 무언가를 올리지 않은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걸 그때쯤 느꼈다. 분명 나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욜로를 추구하진 않지만, 가끔은 그런 사람이 되어보는 건 어떤 기분 일까 상상해보기는 했다. 비행기 티켓사진 하나 올려둔 게 이렇게나 짜릿할 일인가 싶으면서도, 욜로라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을 보니 곧 게이트 문이 열릴 시간인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곧 259번 게이트 앞으로 사람들이 하나둘 줄을 이어 서기 시작했다. 티켓에 있는 바코드를 찍은 후 기나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 비행기 안으로 들어갔다. 하늘색과 하얀색이 어우러져있는 유니폼을 입고 계신 승무원분들이 밝은 표정으로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좌석번호 49K. 비행기 창문이 나의 오른팔과 가장 가까이 닿아있는 자리를 선택했다. 어딜 가든 이동하는 동안 창문을 통해 바깥구경을 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화장실을 가기 위해선 두 명의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야 함에도 불구하고 창가 쪽 자리를 선택했다. 정말 화장실을 가는 문제를 제외하고는 꽤나 만족했던 자리 선택이었다. 

 

머리 위로 짐을 올릴까, 아니면 발밑에 둘까 고민하다 결국 발밑에 두기로 했다. 자리를 잡고 구석에 눌러앉은 벨트를 꺼내맸다. 이내 머리 위의 등에 안내등이 켜지며 비행기가 이륙했다. 비눗방울을 뚫듯 구름을 뚫고 위로 끊임없이 올라가는 비행기 안에서 창밖을 보니 무언가 시원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창가에 딱 붙어 질서 있는 모양새로 나열되어있는 구름을 구경하던 중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례합니다 고객님, 기내식은 어떤 걸로 드릴까요?"

 

대강 세 가지의 선택지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움직이지 않으면 소화능력이 0에 수렴해버리는 소화기관을 위해 샐러드를 선택했다. 승무원분이 걱정 어린 눈빛으로 괜찮으시겠냐고 두세 번 물어보셨는데, 긴 비행시간 동안 세 번 정도 있을 식사 기회 중 하나를 가볍게 쓰는 것이 아닌가 싶은 마음인 듯했다. 그리고 사실 이때까지는 기내 서비스로 신청하면 제공되는 조그마한 기념일 케이크도 있었다. 배고프면 나중에 그걸 먹으면 된다는 생각에 꽤나 쿨 해질 수 있었던 듯했다.

 

샐러드와 함께 와인이 나왔다. 원체 술이 맞지 않는 체질이라 먹을까 말까 고민을 했지만, 앞으로의 체감 비행시간을 줄이기 위해 한두 모금을 마시고 나서 잠드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무언가를 먹을 때 술과 함께 음미하지 못하는 체질이라 샐러드를 해치우고 나서 와인을 마셨다. 두근두근, 알콜이 보내는 신호가 오는듯했다. 열 시간 남짓되는 비행시간 내내 한 번도 눈을 붙이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나는, 덕분에 한 시간 반 정도 눈을 붙일 수 있었다.

 

그래도 남은 시간은 열 시간 정도.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다닥다닥 붙어있는 비행기 좌석은 닭장을 연상케 했다. 몸을 이리저리 틀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곤 앞에 있는 모니터를 켜는 것뿐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영화를 즐겨보는 편이 아니었기에 어떤 영화를 봐야 하나 꽤 오랜 시간 고민했었더랬다. 그러다가 너의 결혼식이라는 큼지막한 글 자위에 박보영과 김영광이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을 발견했다. 나름 재밌게 봤었는데 여기서 다시 보니 꽤 반가웠다. 

영화를 틀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과 결말이 머릿속을 비집고 나와 화면을 헤집고 다니려 했지만, 불 꺼진 비행기 안에서 은은한 등불 아래 이 영화를 다시 보고 있으니 무언가 싱숭생숭했다. 마침 승무원분이 간식이라고 건네주신 양념된 땅콩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받아 들고선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벌써 밤이 된 건지, 아니면 태양과 멀어지고 있는 건지 창밖은 온통 까만색이었다. 그 어둠 사이로 간간히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창밖을 멍하니 보다가 창 끝에 맺혀있는 얼음 결정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한동안 얼음결정과 어둠 속을 가로지르며 반짝거리는 몇 개의 빛을 번갈아 보다가 창가에 머리를 대고 잠이 들었다. 좁디좁은 이코노미 좌석에서 뒤척거리며 자다 깨다 반복을 했다. 다음에 유럽을 다시 가게 된다면 직항 말고 경유나 스톱오버를 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좋은 경험이지 뭐.

삭신이 쑤시는 밤이다. 그렇게 세 번의 기내식을 끝으로 파리 샤를 드골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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