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몇 사람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가능성 있는 사회라 말한다. 가능성이라는 것은 긍정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편이며 사람들은 이러한 흐름에 따라 가능성이라는 것을 추구하곤 한다. 누군가가 나에게 가능성이 있다는 말을 해주거나, 혹은 내가 나 자신에게서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면 우리는 스스로의 또 다른 잠재력을 찾았다는 생각에 기뻐하게 된다. 그러므로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대체로 부러움의 대상이 되며, 가능성이 있는 상태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달성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과정으로 여겨지고 있다.
어느 정도는 맞고, 또 어느 정도는 그렇지 않다. 가능성이 있는 사람으로 묘사되던 사람들이 무언가를 이루어내는 경우가 많지만, 가능성이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고도 무언가를 해내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가능성이 있는 상태로 보이지 않아도 목표하고 있는바를 충분히 이루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무언가가 될 수 있는 사람이라는 타이틀은 꽤나 매력적이다. 가능성이 있는 상태는 긍정적인 부분을 향해 열려있는 듯한, 무언가를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용기를 북돋워준다. 우리는 이러한 긍정적인 느낌을 우리의 삶 속에서 이어나가고 싶어 한다. 그렇기에 이러한 상태를 손에 꽉 쥐고 가능성이 있는 상태로 노출되는 것을 즐기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상태로만 머물려 하는 것은 오히려 우리의 삶을 우리도 모르게 피폐하게 만들어버리는 경우도 꽤 있다.
가능성이 있는 상태란 하나의 커다란 늪을 건너고 있는 상태와 같다. 나의 잠재성을 볼 수 있음과 동시에 그 상태를 최대한 빠르게 벗어나야만 한다. 가능성이 있는 상태로써 장기간 노출이 된다면, 그러한 상태에 빠져 본질을 잃어버리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가능성이 있는 내 모습에 중독되어 스스로를 미화시키다 보면 결국 원하던 것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상태를 유지해 나가는 것에 에너지를 쏟게 된다.
가능성의 중독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하는, 정신적 유아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게끔 한다. 가능성이 있는 상태의 자신이 부정당하게 되면 받을 상처가 두려워 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분야에 기회가 생긴다 해도 그 기회를 고의적으로 피하게 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가능성을 잃고 싶지 않아 하는 그들의 두려움은 이들이 여전히 머물러있는 이유이며, 실패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회피적 자세이기도 하다.
가끔은 잔인하리만치 자신의 상태를 볼 수도 있어야 한다. 상처를 받을 것을 알면서도 스스로를 상처받을 수 있는 상태에 노출시키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 시도인지 알고 있지만 가능성이 있는 상태에서 어떤 결과로든 벗어나지 못한다면 여전히, 혹은 앞으로도 그 상태에서 멈춰있을 가능성이 있으니 말이다.
어쩌면 이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에서는 사람들을 향해 듣기 좋은 이야기만 해주려 하고, 사람들 또한 그러한 것에 익숙해졌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으로 포장되어 있다고 하던가, 이제는 더 이상 쓴소리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가능성을 잔인하게 물들여버린 것은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만들어버린 것이 아닐까 싶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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