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한 고기 산업을 상대로 더 과격한 비건들이 반발하리라고 예상했다.
비록 시작 세포를 얻는 데 필요한 동물의 수는 훨씬 적지만,
어쨌거나 깨끗한 고기도 사람들에게 식습관을 바꾸지 않고
계속해서 동물을 희생시키며 살라고 활발히 권장하는 게 아닌가.
깨끗한 고기를 인정한다는 건
동물 실험과 소태아혈청을 이용해 개발한 기술을 눈감아준다는 뜻이며,
그 고기를 사는 건 타이슨이나카길처럼 깨끗한 고기 스타트업에 큰돈을 투자하고
세계적으로 동물을 수십억 마리나 도살하는 대형 육류 회사의 배를 불려주는 행동이다.
적어도 온라인 캠페인, 혹은 베이에어리어에서 구호를 외치는 시위,
아니면 몇몇 기업가가 실험실에서 퇴근하는 길에
가짜 소태아혈청이라도 뒤집어쓰는 사건 정도는 있을 줄 알았다.
인간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에 꽤나 큰 비중을 두곤 한다. 이것을 나쁘다고만 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어떠한 문제를 야기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빠르게 흘러가는 세상 속에서 단순히 드러나는 것만을 추구하는 경향은 그 내면에 있는 무언가를 알기 위해 시간을 들여야만 하는 행위보다 더욱 효율적이며 매혹적이게 다가올지도 모른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타인과 다른 부분이 있길 바라며, 그것이 자신이 의도치 않아도 은연중에 드러나길 바란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렇진 않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러한 현상은 그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스스로의 특별함을 드러나기 위해 노력하는듯했다. 행여 자신이 특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는데, 그렇게 느끼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 부분에 대하여 크고 작은 우울감을 경험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 원인은 자신이 특별하기 원하는 마음과 그렇지 못한 현실 상황에 대한 괴리감에서 오는 우울감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특별함을 다양한 방법으로 드러내려 한다. 그중 일부는 타인이 추구하는 것을 대강 자신에게 끼워 넣어보려는 행위를 방법으로 사용하곤 한다. 한때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유행처럼 번진 것이 채식주의였고, 자신이 채식을 선택했다는 것을 드러내며 타인과 다른 자신의 모습에 심취한 건지 타인의 기호를 무조건적으로 비난하고 자신의 가치관을 주입하려는 행위를 일삼았다. 실제로 개인적, 환경적인 이유로 스스로에게만 비건의 가치관을 적용하던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일부 사람들에 의해 비건을 추구한다는 것은 한때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채식에 대한 거부감을 심어주게 되었다.
또다시 그들이 자신의 특별함을 드러낼만한 수단이 등장했다. 고기를 먹고 싶지만 표면적 채식을 추구해아하기에 고기를 쉽게 접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대체재로 등장한 실험실의 고기는 살육을 하지 않는다는 타이틀만으로도 그들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지 않았나 싶었다. 하지만 이들은 이 고기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혹은 연구를 하는 과정에서 살생이 일어나지 않는지에 대한 부분에 대해서는 알려 하지 않았다. 그저 대체육을 연구하고 있는 회사들의 말마따나, 후에 이 고기가 등장했을 때 살생이 없을 것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췄을 뿐이다. 그들에게는 단지 살생을 하지 않는, 자신은 타인과 다르다는 타이틀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을 뿐이니 말이다.
하지만 실험실에서 고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수많은 소태아혈청을 희생시켜야 한다. 이러한 희생은 일차적으로 실험실 뒤에 충분히 묻힐 수 있는 요소였다. 이들이 이 부분을 인지하고 있다 해서 달라지는 건 없을듯해 보였다. 그들은 이러한 과정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충분히 맘 놓고 묻어둘 수 있는 것이다.
고기에 관한 욕구는 문화적으로 구성된 거예요.
동물성 식품을 이용하게 된 건 자명하게 사회적인 과정의 결과예요.
자연스러운 게 아니고요. 인공적인 간섭이 없다면
이 지구에 현재 인간의 동물 섭취 수준을 유지할 정도로
식용 비인간 동물이 충분히 있을 수 없어요.
그리고 다른 종의 젖을 먹는다는 건 전적으로 이상한 일이에요.
거기에는 조금도 자연스러운 면이 없어요.
우리는 말을 하게되기도 전에 고기가 목구멍 속으로 밀려들죠.
아이들에게 고기를 먹이고, 상으로 고기를 줘요.
말을 하기도 전에 이게 맛있는 음식이라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이 메시지는 아주 강력해요. 엄마에게서 오는 메시지잖아요.
고기를 먹는다는 것, 혹은 우리가 주로 고기를 추출해내는 종을 먹는 행위는, 사실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석기시대 때야 영양소를 섭취하기 위해 고기를 먹었다고 하지만,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에는 고기의 영양소를 대체할 식품들이 이미 많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여전히 고기를 먹고, 이러한 행위에 대해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우리는 문화적으로 고기를 '맛있는' 혹은 '가치 있는' 음식으로 분류해버린다. 기념일이나, 누군가를 대접하기 위해 우리는 주로 고기를 가장 먼저 찾게 된다. 자신이 혹은 타인이 고기를 좋아하는가에 대한 요소가 일차적으로 고려되기 이전에 고기를 찾는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고기라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분명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대접할 때 메인 요리로 샐러드를 대접하는 일은 분명 흔하지 않다. 그 사람이 고기보다 야채류를 더 좋아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 사람이 완강히 고기 대신 채소를 요구하고, 그것을 아무리 맛있게 먹더라도 대접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무언가 찜찜한 기분을 쉽사리 지워낼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인식 속 고기는 그렇게 자리 잡아버렸다.
분명 이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종류의 알을 먹는 행위나, 모유를 먹는 행위 또한 마찬가지다. 역사를 되짚어봤을 때, 고기나 타 종의 모유, 그들의 태어나지 않은 새끼들을 먹는 행위가 현재까지 이어진 이유는 그것의 한정성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이 지니고 있는 희소성이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음식으로 분류되도록 만든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이들의 태어나지 않은 새끼, 혹은 이들의 모유를 가져다 먹는 행위는 희소성을 취했다는 것을 드러냄으로써 타인보다 우월하다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려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인간이라는 같은 종족에서의 우월성뿐만 아니라 우리가 약탈하는 모유 혹은 태어나지 않은 새끼가 속하는 종에 대해서도 우월성을 드러내려는 권력 행위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고기는 문화적인 것이에요.
고기의 매력은 부분적으로, 지금 대단히 논란이 될 말을 하는 거지만,
고기를 먹는 행위의 매력은 실제로 그러기 위해 동물을 죽여야 한다는 점이에요.
다른 족에 대한 우월감이요. 고기는 언제나 힘, 남성성, 불, 그런 것들과 연관이 있었어요.
아무런 위험도 없고, 아무런 살육도 없이 실험실이나 공장에서 고기를 기른다면,
아주 비리비리한 고기가 될 거예요. 햄버거라기보다는 브로콜리에 가깝게 되는 거예요.
과도기적 제품이 되어서 식물 유래 식단으로 옮겨가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군요.
인간이 된다는 건 세상을 지배한다는 뜻이니까요.
그리고 우리는 세상을 너무 잘 지배한 나머지 이제는 파괴하죠.
'글에 관하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읽기 좋은 책 :: 'AI 시대, 본능의 미래' 4. 죽음의 미래 (4) | 2021.04.08 |
---|---|
읽기 좋은 책 :: 'AI 시대, 본능의 미래' 3. 탄생의 미래 (4) | 2021.03.29 |
읽기 좋은 책 :: 'AI시대, 본능의 미래' 1. 섹스의 미래 (0) | 2021.03.11 |
읽기 좋은 책 ::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후기 (6) | 2021.02.01 |
읽기 좋은 책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후기 (2) | 2021.01.1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