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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좋은 책 :: 'AI 시대, 본능의 미래' 3. 탄생의 미래

by 이 장르 2021. 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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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인간세계 내부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단지 인간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태어서부터 어른이라는 사회구성원의 형태를 갖추기까지 꽤 오랜 시간을 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분은 인간이라는 종족의 희소성을 만들어냈다. 만약 인간의 체외'생산'이 가능해지게 된다면, 컨베이어 벨트에 놓인 플라스틱 따위처럼 빠른 시간 안에 인간을 '생산'해내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더 나아가 커스터마이징까지 가능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희소성이 떨어지기에, 인간'생산'이 가능해진다면 '인격적'이란 단어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또한 인종차별과 신분제 등의 사회문제처럼, 차별의 형태와 방식이 응용되어 발생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과거처럼 인간은 또다시 공개적으로 차별받는 시대에 살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인간을 '재배'하기 시작하면 출신, 다시 말해 인간이 태어나는 방법에 따라 신분이 나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그토록 투쟁해왔던 인간과 인간 사이의 차별이 또다시 일어나게 될 것이며, 이것에 대한 차별은 의외로 당연하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우월한 위치에 있길 바라니 말이다.

또한 인간의 '재배'는 인간을 '인간으로서의 인간'과 '도구로서의 인간'으로 나누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모든 인간이 그러하듯 '도구로서의 인간'으로 분류되는 인간들 중 사유를 하고 비판적 사고로 몇몇을 선두로 하여 결국 큰 혼란을 가져오게 될 것이다. 물론 이러한 문제가 생길 것에 대비하여 '인간으로서의 인간'에 속하는 부류들은 '도구로서의 인간'에 속하는 인간들을 끊임없이 억압하고 세뇌시키겠지만 말이다.

처칠은 올더스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를 출간하기 불과 1년 전에 이 글을 썼다. 헉슬리는 친구인 홀데인의 아이디어를 많이 빌려왔지만, 정반대로 사용했다. 헉슬리가 그린 2540년의 멋진 신세계는 생식 기술을 일종의 사회적 통제로 사용하는 악몽 같은 디스토피아다. 인간은 돼지 복막을 안에 댄 유리병 속에서 대량생산된다. 중앙 인공부화소의 생산시설에서 컨베이어 벨트 위에 줄지어 놓인 채로 267일 동안 자라는 것이다.

"난자는 하나씩 시험관에서 나와 좀 더 큰 용기로 이동했다. 복막 조각이 신속하게 갈라지면서 상실배(다세포 동물 개체 발육 초기의 상실기에 있는 배)가 자리를 잡고, 염분이 있는 용액이 들어간다. 병의 행렬은 천천히 전진하며 벽에 뚫린 구멍을 통해 '계급 예정실'로 들어간다."

이곳에서 배아는 서로 다른 사회 계급으로 자란다. 일부는 일부러 산소를 적게 공급해 뇌에 손상을 입힌다. 천한 일에도 만족하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다. 어떤 배아는 얼어붙을 듯한 환경에서 자라 추위를 아주 싫어하게 된다. 그래서 기꺼이 열대 지방에서 일하는 광부가 된다. 헉슬리 이후로 우생학은 우리의 집단 상상력 속에서 언제나 SF의 어두운 비유로만 머물렀다.

- 제니 클리먼, 'AI 시대, 본능의 미래'

전체주의와 개인주의는 세계가 사회적으로 과도기를 겪어가면서 다양한 충돌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기존의 전체주의적 관점으로 보아왔던 희생은, 이제 더 이상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사회가 흘러감에 따라 기존 가치도 변화한다. 임신으로부터 파생된 희생을 강요받던 이들 또한 집단을 위해 더 이상은 개인을 희생하지 않겠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어찌 보면 당연한 흐름일지도 모른다. 전체주의가 만연하게 퍼져있던 동안 개인의 희생이 당연하게 여겨져왔고, 그 희생에 대한 보상을 받지 못한 채로 개인의 삶은 철저하게 외면되고 버려졌다. 버려진 개인은 그 누구도 기억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오랜 역사의 흐름으로 이미 학습했다.

전체가 있어야 개인이 있다는 관점은 이제 무너져가고 있다. 어쩌면 이미 무너져 그 흔적만 남았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개인이 있어야 전체가 존재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다. 전체주의의 흔적을 강요하는 이들은 개인의 희생을 더 이상 공식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강요할 수 없게 되었다.

인간은 임신을 하나의 질병으로 인지한다. 그렇기에 임신이란 것은 오랜 기간에 걸쳐 인간의 몸에 일어나는 현상이었지만,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인지하지는 못한다는 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인간의 몸은 인간의 건강이 나빠지지 않도록 작용하는 것을 기본값으로 가지고 있다. 하지만 임신이란 것은 어떠한 세포가 기형적으로 커져 세포를 지니고 있는 신체의 영양소를 빼앗아가는 행위이다. 인간의 몸이 자신의 기본값을 거스르는, 임신이란 행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리는 만무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임신을 강요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임신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해 한 번도 노력해 보지 않은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 이 부류들은 성별에 관계없이, 단지 타인이 임신이라는 경험을 하지 않으려 한다는 이유만으로 질타를 한다. 임신 주최자의 선택은 철저히 무시하며, 들으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타인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그들의 무지에서 나온 행위일 가능성이 높다.

임신은 고통과 괴로움을 유발하는 건강 상태이며, 오로지 여성에게만 영향을 끼친다.
남성이 임신을 겪지 않아도 유전적인 관련이 있는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반면
여성은 그러지 못한다는 사실은 태생적인 불공평함이다.
임신의 필요성과 출산, 우리가 인류로서 공유하는 사회 가치인 독립, 기회의 평등, 자율,
교육, 경력, 관계 충족 사이에는 근본적이고 변하지 않는 갈등이 있다.

...

여성을 아이의 안녕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포기해야만 하는 아기 전달자로 보거나

우리 사회의 가치와 전문 의학 수준이 더 이상 '자연스러운' 생식과

호환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거나 둘 중 하나다.

- 제니 클리먼, 'AI 시대, 본능의 미래'

 

 

무지한 자들에 의해 원치 않는 임신으로 밀려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강요하는 이들 스스로가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이 똑똑하다고 믿기에 자신의 타인에게 강요하는 행위가 존중이 없는 행위인지 인지 자체를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모든 일에는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이 있는 것이 당연한데, 사회는 여태까지 임신이라는 정상적이지 않은 신체의 현상을, 그저 고귀한 단어를 사용하여 긍정적인 면만을 드러내어왔다. 문명이 생기면서부터 대부분 임신의 주체들은 사회적으로 을의 위치에 있었으므로, 이들의 목소리는 묻어버리는 것은 꽤나 쉬운 작업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점차 임신의 주체들이 사회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이제 이들은 임신에 대한 강요가 정상적이 아닌 것임에 대하여 드러나기 시작하고 있다.

어쩌면 이것이 임신의 주체들을 사회적 을로 만들어버리기 위해 억압하는 원인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주변에서 익히 보아왔듯, 임신이란 것은 제약적 측면이 크기 때문에 한 개인의 삶을 온전히 개인으로 사용하지 못하게끔 한다. 임신 이후의 개인의 삶은 희생의 연속에 가깝다. 임신에서부터 파생된 희생이란 것에 교집합적으로 걸쳐있다거나, 혹은 이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들은 임신의 과정을 알려 하지 않을뿐더러, 그 위험성에 대해 무지하기에 임신의 주체 혹은 임신의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에게 강요한다. 이는 자신에게 일어날 일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몸을 이용해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기괴한지는 전혀 알아채지 못하는 거예요. 아무리 서양 의학이 있다고 해도
그게 얼마나 위험한 과정인지도요.

- 제니 클리먼, 'AI 시대, 본능의 미래'

 

 

세상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정립하기 위해 몇십 년을 열심히 살아온 임신부보다 생성된 지 며칠 혹은 몇 주 되지 않은 세포의 생존 여부가 더 존중받는 세상이다. 모순적이지 않는가. 몸속 세포보다 다양한 세포들이 이루어 만들어진 인간이라는 개체가 더 천대를 받는다니. 임신의 주최자들은 임신을 하는 동안 세포를 보호하는 개체 따위로 취급된다. 사회는 마치 임신 주최자들을 고귀한 존재인 듯 묘사하지만, 실제로는 임신 주최자들이 사회적으로 고귀한 취급을 받고 있다는 것을 임신에 대해 교집합 위치에 있는 사람들과 그와 무관한 사람들에게 어필하고 있는 것뿐이다.

인간은 모든 것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길 바란다. 그것은 인간의 본능이며, 과학기술은 인간이 원하는 방향으로 발전한다. 돈은 인간의 요구에 따라 흐른다. 그렇기에 임신과 출산에 대한 의학기술 또한 이러한 방향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임신과 출산 과정이 나날이 투명해지고 있다. 우리는 임신 주최자의 임신 전의 임신 가능 여부부터 태아의 모습까지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 임신 주최자의 임신 가능성을 실시간 전 국민이 볼 수 있는 가임기 지도 따위도 돈을 들여 만드는 세상이다. 과학기술이 발전할수록 임신 주최자는 인간으로서 보답 출산 매체로 살아갈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비혼 혹은 딩크는 이런 참혹한 현실에서 파생된 결과물이 아닐까.

 

 

 

의학이 발전할수록 더 많은 여성이 해를 입어요.
자궁 속에 있는 태아를 관리하고 감시하게 해주는 방법은 여성의 삶에,
여성이 받아야 하는 의학적 개입의 종류에 영향을 끼처요.
저는 모체와 태아 의학에서는 대단히 획기적인 발전이 일어날 것 같지 않아요.
하지만 자궁 속의 무엇이 태아에게 좋고 나쁜지를 정말 많이 알게 되어서
여성의 삶이 마치 체외 발생용 임신 장치처럼 변해간다는 건 확실히 보여요.
순전히 아기에게 좋은 것을 극대화하는 게 여성의 기능이 되는 거죠.

- 제니 클리먼, 'AI 시대, 본능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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