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그리고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맞춰 과학기술 또한 발전해 나가고 있다. 현재의 인류는 이전까지의 세대들보다 지구에서 오래 살아남게 될 것이다. 물론 환경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긴 하지만, 그것을 별개로 한다면 말이다.
인간의 수면연장이 좋은 것일까? 이에 대한 질문을 하면 대부분은 좋다는 쪽으로 답변을 한다. 하지만 이것이 온전한 본인의 생각에서 도출해낸 결과인지, 아니면 사회적으로 주입되어버린 답변인지는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인생의 절대적인 시간이 길어진다는 것이, 노동을 할 수 있는 혹은 해야 하는 시간이 길어진다는 것이 과연 좋은 일일까. 전 세계적으로 출산율은 감소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존재하는 체제들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현재 혹은 현재보다 더 많은 인간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출산율은 늘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도 당연한 것이, 인간은 생존에 유리한 쪽으로 나아가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현시대에 출산을 하여 아이를 키우는 것과 딩크나 비혼으로 살아가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생존에 유리한지는 이미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는 인간의 수명을 늘리는 방법을 택하는 것을 차선책으로 추진하고 있다. 노동가능한 인구를 늘리지 못한다면 줄어들지 못하게 현재 노동하고 있는 인구를 그대로 유지하는 방법을 취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회적으로 인간에 대한 노동력 착취를 연장시키기 위해 인간의 수명연장에 대한 연구에 막대한 비용을 투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이러한 선택이 자신을 착취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대부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릴 때부터 과학기술은 긍정적인 것이고, 생명 연장은 과학기술의 발전이 이루어낸 업적이기 때문에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이전 세대가 누리지 못한 것을 우리는 과학기술이 발전함으로써 누릴 수 있는 하나의 특권을 누리는 것이라고 사회는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다. 그렇기에 인간은 사유를 하지 않으면 별다른 비판 없이 사회의 주입식 사고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회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사유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사회는 결코 개인을 위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기에 개인이 이러한 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사회적 의도를 파악해야 한다.
통찰력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똑똑한 것, 지적인 능력이 뛰어난 것과는 관련이 적다. 똑똑해지기 위해, 지적 능력치를 올리기 위해 우리는 다양한 공부를 한다. 하지만 통찰력이라는 것은 우리가 왜 똑똑해지고 싶어 하는지, 지적인 능력에 대해 갈망을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갈 수 있는 능력치이다. 유감스럽게도 통찰력이란 것은 대부분 노력에 의해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끊임없는 사유의 과정을 반복하지 않으면 얻어내기 어렵다. 사회가 개인들의 사유를 간접적으로 막는 것 또한 이런 이유에서이다.
사회는 사유를 하지 않아도 살아가는 데에 지장이 없다는 것을 다양한 매체들을 통해 끊임없이 노출시킨다. 또한 사유하는 행위를 금전적 활동과는 별개로 이루어지는 비생산적인 행위라는 인식을 심어주곤 한다. 이렇듯 사유를 하지 않을 경우, 우리는 '누군가'의 말을 여과 없이 신뢰하게 된다.
주체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다져진 사유를 통해 스스로의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 똑똑해지는 것에 집착하기보다 주체적으로 현명함을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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