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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노트/생각노트

그 많던 가해자는 어디로 갔나

by 이 장르 2021. 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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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래전부터 뉴스에서 '일가족 동반자살'이라는 단어를 심심찮게 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단어는 경제적 상황이 좋지 않을수록 더욱더 빈번하게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사회의 발전 속도가 줄어들면서 계층 간 이동 가능성이 점점 낮아지고 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삶에 좌절감을 느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이유로 누군가를 죽인다는 것이 용납되진 않는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선 여전히 '동반자살'이란 이름의 살인사건이 꾸준히 일어나고 있다.

이미 죽어버린 피해자가 죽음을 원했던 것인지, 아니면 다른 혈연관계로부터 죽음을 강요받았는지, 우리는 여전히 알 수 없다. 다시 말해 자발적으로 자살을 시도 한 것인지, 가족에게 살해를 당한 후 가해자 스스로 자살한 것인지 명확한 피해자의 의견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암묵적으로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가까운 혈연으로 이어진 관계의 인물이 같은 날 비슷한 시간에 살인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피해자보다 물리적 혹은 정신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것을 말이다. 실지로 이러한 사건에 '동반자살'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국가는 한국과 일본뿐이라고 한다. 한국과 일본의 권력의 우위를 점한 가해자에게 연민의 시선으로 접근하는 것은 이 두 국가가 유일하다는 것이다. 사실 전 세계적으로는 이러한 사건을 '살해 후 자살(Murder Suiside)'로 명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확히 나누어진 사건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건을 가해자의 시각에서 정의한다. 자신이 가족을 책임지지 못한다는, 앞으로의 고통이 명확해서 그 고통 속에 둘 수 없다는 어쭙잖은 변명으로 가해자를 대신해 감싸주기 바쁘다. 이러한 행위는 사망 시점 이후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야 하는 피해자들에게 2차가 해를 행하는 것이다. 결국 피해자들은 세상에서 가장 든든해야 하는 존재가 가장 위험한 존재로 바뀌는 데에서 오는 배신감을 경험하게 되며, 이러한 범죄 속에서 가해자를 두둔하는 세상의 소리에 어떠한 감정을 느끼고 있을까.

세상은 가족이란 이름으로 가해자를 보호하기 바쁘다. 일가족이 한 번에 살해당했는데도 불구하고 가해자의 범죄에 대하나 그 어떤 조사도 하지 않는다. 세상의 초점은 오직 가해자의 사연에 맞춰져있다. 언론의 입장에서, 정치적으로 자신들을 위해 감성팔이 할 수 있는 소재를 얻어 가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목적인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가해자의 어쭙잖은 변명, 그리고 그들에게 살해당한 약자들의 신상정보 따위만 관심 있을 뿐이다.

결국 피해자들은 그 어디에도 남아있을 수 없게 되었다. 부모의 선택으로 세상에 나왔지만, 가족으로 인해 무참히 살해당했다. 그 어느 것도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오랜 기간 피해자들은 꾸준히 늘어나고 있지만, 우리는 '동반자살'이라는 명목하에 살해되고 있는 수많은 생명들을 위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살해된 아이들의 진술을 들을 수 없다. '동반자살'은 가해 부모의 언어다. 아이의 언어로 말한다면 이는 피살이다. 법의 언어로 말하더라도 이는 명백한 살인이다. '동반자살'이 아니다. '동반자살'이라는 단어에 숨겨진 우리 사회의 잘못된 인식을 걷어낼 필요가 있다. 참담한 심정으로 애통하게 숨져간 아이의 이름을 다시 부른다. 이 이름이 '동반자살'이라는 명목으로 숨져간 마지막 이름이기를 희망한다. 얼마나 더 많은 아이들이 죽어야만 그런 세상에 도달할 수 있을까. 얼마나 더 많은 아이들이 살해되어야 하는가. 세상을 일깨우기 위한 희생은 최초의 한 아이만으로도 이미 충분했다. 부족한 건 언제나 행동뿐이다.

- '동반자살' 사건을 재판했던 한 판사의 판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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