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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관하여

읽기 좋은 책 :: '반 고흐, 영혼의 편지' 1편

by 이 장르 2021. 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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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아직도 네가 평범한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낄 때가 있다고 했지. 그러면서 너는 왜 네 영혼 속에 있는 최상의 가치를 죽여 없애려는 거냐? 그렇게 한다면 네가 겁내는 일이 이루어지고 말 것이다. 사람이 왜 평범하게 된다고 생각하니? 그건 세상이 명령하는 대로 오늘은 이것에 따르고 내일은 다른 것에 맞추면서, 세상에 결코 반대하지 않고 다수의 의견에 따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특별하다. 아니, 특별했다는 과거형이 더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꾸준히 평범해지길 강요받았고, 결국 평범과 가까워지고 있다. 아니, 사실 평범한 척을 하고 있는 걸 수도.

우리는 모두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가 빛을 발할 수 있는 부분은 각기 다르다.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평범함을 강요하고 있다. 단순히 그들이 다양성에 대하여 무지하기 때문이 아니라, 다수를 수월하게 관리하기 위한 그들의 보이지 않는 통치방법일 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정한 평범의 기준에서 벗어난 사람들에게 페널티를 쥐여주었다. 이는 페널티를 받은 혹은 불이익의 장면을 지켜본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평범함에서 벗어나지 말아야겠다는 경각심을 심어주는 가지도록 하기 위함일 것이다.

 

의욕적으로 일하려면 실수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흔히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면 훌륭하게 될 거라고 하지. 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너도 그런 생각은 착각이라고 말했잖아. 그들은 그런 식으로 자신의 침체와 평범함을 숨기려고 한다.

사람을 바보처럼 노려보는 텅 빈 캔버스를 마주할 때면, 그 위에 무엇이든 그려야 한다. 너는 텅 빈 캔버스가 사람을 얼마나 무력하게 만드는지 모를 것이다. 비어 있는 캔버스의 응시, 그것은 화가에게 "넌 아무것도 할 수 없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캔버스의 백치 같은 마법에 홀린 화가들은 결국 바보가 되어버리지. 많은 화가들은 텅 빈 캔버스 앞에 서면 두려움을 느낀다. 반면에 텅 빈 캔버스는 "넌 할 수 없어."라는 마법을 깨부수는 열정적이고 진지한 화가를 두려워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실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만연하게 퍼져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오랜 기간 실수를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되며, 실수를 한 사람을 패배자로 정의한다. 인간은 분명 완벽한 존재가 아님에도 실수를 하지 말아야 하는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실수는 우리를 성장시킨다. 정확히 말하자면, 실수로 인해 우리는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성장시킨다. 이들이 배운 무언가는 각자의 경험과 실수에 대한 인식 등 여러 가지 요소에 따라 다르다. 실수를 하지 않으려 주의하는 태도를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며, 실수에서 오는 불안감보다는 안정감을 더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말이다. 실수라는 것이 단지 부정적인 면만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좋은 부분과 좋지 않은 부분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그 어느 것도 한 가지의 요소만 지닌 것은 없다. 그렇기에 모든 선택의 순간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답은 없다. 우리가 무언가를 선택할 때엔 좋은 부분과 좋지 않은 부분 중 어떤 것이 더 자신에게 와닿는가, 어느 정도까지 감당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판단 후 선택하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결정을 빠르게 내리기 위해서는 스스로와 끊임없는 대화가 필요하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게으름을 기본값으로 가지고 태어난다. 우리가 몸을 움직여 무언가를 해내는 것보다 가만히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가 더 편하게 느껴진다. 다시 말해 에너지가 적게 사용되는 상태에 놓이기 위해,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게을러질 수 있는 선택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어떠한 것에 도전하기 전 오랜 기간 생각을 하게 되면, 우리의 무의식은 도전에 대한 해결방안보다 하지 않아도 될 이유를 찾아내려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떠한 것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그 순간부터 무의식이 작용하기 전까지의 골든타임을 놓쳐서는 안 된다. 하지만 만약 실수를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다면, 우리의 무의식이 우리가 게으른 상태에 놓여야 할 이유를 빠르게 만들어낼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렇게 도전의 골든타임은 짧아지게 된다. 결국 세상이 저지른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게 된다면, 온전한 우리의 삶을 살아내기 어렵지 않을까.

 

 

우리는 우리 자신으로 살아 있어야 한다. 그러니 너 스스로 퇴보하길 바라지 않는 이상 공부는 필요하지 않다. 많이 즐기고 많은 재미를 느껴라. 그리고 오늘날 사람들이 예술에서 요구하는 것은 강렬한 색채와 강한 힘을 가진 살아 있는 어떤 것임을 명심해라. 네 건강을 돌보고 힘을 기르고 강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최고의 공부다.

 

 

 

공부는 과거의 지식을 학습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공부를 하는 이유는 단지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함이며, 공부로 습득한 지식이 과거 그 시점에 적용된 것처럼 현재에 적용해 동일한 결과를 낼 것이라는 기대를 하긴 어렵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현재 적용되는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공부를 하는 것보다 직접 마주해보는 것이 더 효율적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공부를 하는 행위는 도전에 대한 두려움을 최소화해줄지도 모른다. 여전히 시작하지 않은 상태이지만,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에서 오는 안정감이 만족감을 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 시작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원하던 안일함일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도전을 위한 공부를 하면서도 도전하지 않는 것은, 실제로 어떤 일도 나타나지 않을 가능성을 키울 뿐이다.

공부하는 모든 이들을 비난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공부를 하며 알게 된 지식이 절대적이라는 생각을 피해야 한다는 말이다. 공부가 주는 안락함에 빠져, 공부를 하는 근본적인 목적이 도전하기 위함임을 잊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우울증에 걸리거나 비뚤어지고 적의에 차서 성을 잘 내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용서하는 것이다. 우리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거나 전혀 알지 못할 때라도, 평정을 유지하는 것이 약국에서 파는 약보다 더 좋은 약이 될 것이다. 대부분의 일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성장하고 발전하게 돼 있다.

그러니 너무 기를 쓰고 공부하지는 말아라. 공부는 독창성을 죽일 뿐이다. 너 자신을 즐겨라! 부족하게 즐기는 것보다는 지나치게 즐기는 쪽이 낫다. 그리고 예술이나 사랑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마라. 그건 주로 기질의 문제라서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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