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버나움[Capharnum, Capernaum]: 갈릴리호 북쪽에 있는 팔레스타인의 도시. 예수가 기적을 행했지만 마을 사람들이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아 멸망할 것이라는 저주가 내려진 지역.
태어날 때부터 ‘서류’를 가지지 못한 아이의 운명은 그저 그 아이가 온전히 감당해야 하는 몫인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그의 탓일까. 탓을 한다고 해서 그들의 인생에 변화가 있을까.
인간적인 대우를 받지 못했던 부모에게서 받을 수 있는 대우는 비인간적인 대우뿐이었다. 부모의 경험 중 일부가 대물림 된다는 것, 그것 또한 유전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빛을 찾아볼 수 없는 인생 속에서 그 원인을 찾기 시작하다가 결국 자신의 탄생을 탓할 때에, 이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누군가에겐 경험, 또 다른 누군가에겐 삶. 그저 철창 너머의 삶을 넌지시 보며, 그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만으로 그들을 위하고 있다고 자위하고 있는 세상 속 사람들.
잔인하게도 타인의 고통은 나의 안위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작용되어버린다. 우리는 그렇게 배워왔고, 그렇게 사고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는 것이다.
“신은 하나를 가져가면 하나를 돌려주신단다.”
“뭘 돌려줬는데요?”
“엄마 아기 가졌어. 네게 동생이 생길 거야.”
“마음이 아프네요.”
“딸이면 좋겠어. ‘사하르’라고 하게.”
“엄마 말이 칼처럼 심장을 찌르네요.”
“네가 나올 때쯤이면 네 동생은 걷기도 하고 놀기도 하고...”
“다신 여기 오지 마세요. 엄만 감정이 없나 봐요.”
개개인을 인격체로 마주하는 이유도, 방법도 몰랐던 부모들이 자신의 자식을 대할 때, 그들도 모르게 얼마나 잔인해지는가. 서류로 인간의 여부를 증명하는 세상에서 그들은 얼마나 더 고독하고 고단해져야 하는가.
“어른들한테 말하고 싶어요. 애들을 돌보지 않는 부모가 지긋지긋해요. 여기서 제가 얻는 게 뭐죠? 욕먹고 얻어맞고 발길질당하고 …. 자라서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존중받고 사랑받고 싶었어요. 하지만 신은 그걸 바라지 않아요. 우리가 바닥에서 짓밟히길 바라죠.”
영화가 영화에서 끝난 것이 아닌, 스크린 밖의 변화를 가져왔기에 해피엔딩에 대한 편견을 돌이켜볼 수 있게 만들어 준 영화.
본받고 싶지만 본받기 어려운, 이런 영화를 나도 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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