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그 자체로 무제한적인 것인가. 단지 측량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무제한적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섣부른 것이 아닐까.
지금 우리에게, 아마도 자유란 그런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유한한 것.
지구에서 이용할 수 있는 자유의 총량은 정해져 있다. 누군가가 이전보다 더 자유로워질 때 또 다른 누군가는 상대적으로 자유가 제한된다는 것.
제국주의가 만연하던 시대에는 그 형태가 식민지배로 나타나곤 했다. 국토와 자원, 인력뿐만 아니라 그들의 자유까지도 약탈했던 것이다.
이 형태는 시대가 변함에 따라 지주와 노동자의 형태로 바뀌었고, 지금도 그 형태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물론 이전보다 다양해진 터라 그 형태를 이전보다 정의하기 어려워지긴 했지만 권력자와 비 권력자의 관계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변함이 없다.
조금 더 거시적인 시각으로 보자면, 이것은 분명 인간과 인간 사이에만 적용되는 법칙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과 환경, 인간과 동물, 동물과 환경, 인간과 태양계 등.
‘사회적 거리 두기’, 코로나로 인해 인간은 또 다른 인간과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당연시 누려왔던 자유를 제한받게 되었다. 그것이 자의든 타의든 말이다.
최근 인스타그램에서 몇 장의 사진을 보게 되었다. 그중 하나가 윈난 성에 사는 코끼리들의 사진. 옥수수술을 먹고 기분이 좋아져 밭에 누워 여유를 즐기고 있는 사진이었다. 사진 속의 코끼리들은 분명 웃고 있었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해 인간이 제한받은 자유가 자연스럽게 동물에게 흘러간 것이다.
다시 말해, 먹이사슬에서 인간보다 아래에 있던 동물들이 위에서 흘러내린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독식해왔는가. 많은 것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더 가지길 원했고, 원하고 있는가. 권리는 누리되 그에 따른 의무는 다른 개체에 떠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나.
우리는, 이기적인 유전자를 결코 자랑스러워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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