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홀을 떠난다 하면 받는 여러 가지 질문들이 있다. 무작정 다 두고 떠난다기엔 두고 가는 것들이 꽤 많기 때문에 이런 리스크를 감안하고서라도 떠나려 한다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그렇기에 이런 질문은 그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수많은 걱정의 형태 중 하나겠지.
모순적인 부분이 있다면 당차게 워홀을 다녀와야 한다 말하면서도 워홀에 가서 무얼 얻어오고 싶냐는 질문엔 막연한 대답조차 하기 어렵단 사실이었다. 그저 영어, 경험이라 말하기엔 그것보다 얻어올 수 있는 게 많을듯하고, 잘 모르겠다 대답하기엔 이미 워홀을 경험한 사람들이 남긴 수많은 경험담이 세상에 널려있었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조차 명확한 대답을 내밀 수 없던 이 질문에 끊임없이 물음표를 던져보게 됐다. 왜 나는 워홀을 떠나려 하는 걸까. 그 답변을 오늘 보게 된 유튜브 영상에서 찾을 수 있었다.
3년 정도 콘텐츠를 만들다 보면 더 이상 내 안에 남아있는 게 없어요.
채워지는 게 없이 계속 계속 꺼내다가 쓰기만 하니까
어느 순간 이렇게 속이 텅 빈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저희가 맨날 똑같이 새벽까지 야근을 하고 있는데
에디터 H가 되게 허망한 얼굴을 하고 그 말을 하더라고요.
'혜민아 나한테 이제 남은 문장이 없다.'
- 유튜브 '드로우앤드루' 채널 '디 에디트'편 인터뷰 중
이거였다. 내가 최근에 겪어본 감정 중 가장 두려운 감정이었다. 채워야 할 시간 없이 꺼내 쓰기만 하니 스스로 비어가는 게 눈에 보이지만 외면했던 그 시간들. 슬펐던 건 이런 것들이 분명하게 보여도 꺼내 쓰는 걸 멈출 수 없을뿐더러 다시 채워 넣는 시간을 가지기로 결심하는 건 더 쉽지 않다는 것이다. 아마 경험해 본 사람들은 알겠지.
나에게도 남은 문장이 없었던 시간들이 있었다. 쌓아뒀던 것이 바닥을 보이고 있음에도 멈추지 못하는 내가 한심하게 느껴지면서, 동시에 멈춰버리는 순간 내가 해왔던 모든 것들이 물거품이 되어버릴까 두려워지던 그 순간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결국 나는 환경의 변화로 인해 멈출 수밖에 없었고, 다시 혼자만의 시간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다시 책을 읽고, 유튜브 영상에서 영감을 얻어보고, 그동안 미뤄왔던 글을 써보기 시작했다. 수십 편의 영화와 다큐멘터리를 봤으며 사람들과 깊은 대화도 꾸준히 나눠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내 문장은 다시금 조금씩 채워지고 있었다.
이런 감정을 또다시 마주할까 두려워하고 있었던 걸까. 그렇기에 또다시 채워 넣을 무언가를 찾아 나선다는 이유로 워홀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결국 내가 워홀을 떠나는 이유는 두려움이었다. 불확실성에 나 자신을 던지는 것보다 두려웠던 건 남은 문장이 없는 거였나 보다.
사람들은 새로운 환경에 자신을 던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나는 문장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모순적이지만 당신이 두려워하는 그것들이 나에겐 두려움을 피하는 방법이었나 보다. 그래서 내가 당신들의 눈엔 두려움 없는 사람으로 비칠 수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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