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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으로서의 기록

🇦🇺 D-2 실감이 안 나

by 이 장르 2022.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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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지막한 점심때부터 들려오던 빗소리는 멈출 생각을 안 하는 것 보니 이곳의 장마가 시작됐나 보다. 우리 동네도 멜버른도 그 흐린 하늘이 연결되어 있다는 듯. 우리 집 강아지는 빗소리가 무서운 지 몇 시간째 내 의자 뒤쪽에 끼여앉아 창문 쪽을 바라보고 있다.

곱창을 워낙 좋아해서 호주에 가기 전에 곱창을 먹고 가겠노라며 배민 앱을 켜 주문을 했다. 주문을 하고선 찬찬히 살펴보니 멜버른에 이미 곱창전골 맛집이 있었네. 확실히 한국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동네는 다르구나. 일단 구글 지도에 별표를 꽃아두고선 멜버른을 떠나기 전에 가보겠노라 다짐했다. 그래도 기다리고 있어 빨리 와줘 내 야채곱창.

호주 가기 전 며칠 동안 우리 집 강아지와 함께 지내다가고 싶어 엄마가 강아지를 우리 집에 데려왔다. 엄마는 걱정이 됐는지 계속해서 강아지의 안부를 묻고 있다. 성격이 있는 편인 우리 꾸미는 첫날엔 많이 화가 나 보였지만 이내 곧 적응하고선 나랑 같이 백수 라이프를 즐기고 있다. 하루 종일 함께하는 사람이 있는 게 강아지에게 안정감을 주나보다.

덕분에 이전의 취침시간보다 한두 시간 일찍 베개에 머리를 올려두게 됐다. 한 달 동안 말 못 할 정도로 망가진 신체리듬을 어떻게 다시 되돌릴 수 있을지 걱정이었는데 말이야. 그나마 매일 하고 있는 운동 덕에 이 정도의 체력을 유지하고 있던 거겠지. 한 달 동안 하고 싶은 대로 쉬다 보니 문득 곧 출국을 한다는 사실이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이 생활 더하다간 없던 병도 생기겠어.

얼마 전 시드니에 있는 친구와 영상통화를 했다. 호주 생활은 현실이라는 말과 달리 친구의 표정은 행복해 보였다. 확실히 한국에서의 표정은 아니구나.

먼지 쌓인 캐리어를 꺼내 열었다. 미루고 미루다 벌써 출국 이틀 전까지 왔다. 분명 친구가 출국 5일 전에 짐 싸는 짓은 하지 말라는 얘길 했었는데 그나마 5일 남겨 둔 거면 다행인 거네. 뭘 넣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일단 가지고 가려는 것들을 모두 채워 넣고선 빼보기로 했다. 하나하나 덜어내면서도 버리지 못한 미련이 한 번 더 캐리어 속을 꾹꾹 눌렀다.

기대를 하고 있지만 기대하지 않는다. 여행조차 고통인데 집을 구하고, 일을 구하고, 외국어를 쓰며 해야 하는 생활이 고통스럽지 않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럼에도 가는 이유는 걱정하는 이유와 마찬가지로 알 수 없으니. 뭐 젊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 같잖은 소리 말고.

이제 진짜 가는구나, 실감을 느끼기엔 아직 해야 할 일들이 남았다. 오늘 환전을 하고 핸드폰 정지 예약을 걸어뒀다. 아 핸드폰이 정지되고 나서야 실감 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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