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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으로서의 기록/2022 🇦🇺

🇦🇺나도, 너도 그리고 우리들의 20대도

by 이 장르 2023. 1.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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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달란 부탁을 하면서 T에게도 너의 이야기를 들려달라 했다. 사실 정 없어 보이는 말일지는 모르겠지만 T에게 요청하면서도, 난 네가 아직 누군지 모르잖아라는 표현을 썼더랬다. 우리는 단지 시프트가 겹치던 그 2일뿐이었으니, 심지어 그때조차도 나의 짧은 영어 때문에 시답잖은 얘기만 했는걸. 날 모르는 건 T도 마찬가지겠지.

저 말에 T가 당황하지 않았을까 잠시 고민했지만, 그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 말 이후에 오히려 더 살갑게 구는 T였다. 집이 매장 바로 앞이라 브레이크 타임에 스탭밀 테이크아웃해서 집에 가는 네가 이 이후엔 여기서 나랑 같이 브레이크 타임 내내 밥 먹으면서 얘길 했으니. 아마도 T는 내가 너에 대해 어떤 사람인지 안다는 식으로 말했으면 불쾌해했을듯했다. 참 다르면서도 꽤 닮은 점이 있는 너와 내가 이 프로젝트만 성공적으로 끝낸다면 앞으로도 좋은 협업 파트너,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하나둘 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그것도 시간을 들여 써줘야 하는 작업이기에 조심스럽게 연락을 돌렸다. 다행히도 다들 흔쾌히도 해준다는 말을 했다. 너무나 흔쾌히 대답을 하길래 당황스럽기도 했다. 이번 달까지 모두 받을 수 있을까 의문이 들긴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흔쾌한 대답을 듣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더라.

나 또한 T에게 보낼, 그리고 내 20대를 돌아보기 위해 내 이야기를 적기 시작했다. 일단 오피스 웍스로 가 서 1달러도 되지 않는 48장짜리 노트를 샀다. 그리고 첫 부분부터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무슨 이야기를 써야 할까 처음엔 막막했지만 쓰다 보니 잊었던 기억들, 그리고 감정들이 하나하나 떠오르기 시작했다. 확실히 쉬운 과정은 아니었다. 나의 20대란, 나에게 쉽지 않았고 여전히 쉽지 않다.

T 또한 자신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고 했다. 역시나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 있게 써주겠다고 말했던 T도, 생각보다 쉽지 않다고 나를 볼 때마다 그러더라. 그리고 최대한 빨리 써주겠다던 자신의 말과는 달리 시간은 계속 지나가고 있다 보니 T 또한 나를 볼 때마다 압박감을 느끼는 것 같기도 했다. 평소 같았으면 조용한 시간에 옆에 와서 How are you?부터 시작해 주절주절 얘기도 하고 장난도 칠 텐데, 이걸 쓰기 시작한 후부터는 반갑게 인사하고 나서도 내가 먼저 How are you?를 해야 그제야 긴장이 풀린 표정으로 아직 자기 얘길 쓰는 중이라고 얘길 해주더라. 나는 T가 이걸 쓰는 데에 시간이 걸릴 거라 이미 예상하고 있었지만, T는 오히려 이것에 대해 한마디도 꺼내지 않던 나에게 불안감을 느꼈었나 보다. T에게 나 또한 이걸 쓰는 데에 쉽지 않다는 것을 말했음에도 그 말이 그저 자신을 다독이려는 말로 들렸나 보다. 나 또한 T에게 보내야 한다는 명분이 없었더라면 나의 20대를 적어내려가는 것을 마무리 짓지 못했을걸.

나의 20대를 적어내려가기 시작하던 그 첫 주엔 매일같이 울었더랬다. 잊고 싶어 기억 속에 묻어두었던 감정들이 나를 괴롭혔다. 출근하던, 그리고 퇴근하던 그 길에서 청승맞게 눈물을 참아내려 하늘을 몇 번이나 봤는지 모른다. 데드라인이 정해져있지 않았더라면, 누군가에게 보내지 않아도 되는 거였더라면 아마 나는 좀 더 게을러졌을지도 모른다. 쉽지 않은 내 프로젝트에 함께해 준 사람들에게 너무나 고마울 뿐이다.

T가 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보내주기 전에 내 이야기를 먼저 보내주는 게 나을 것 같다는 결론이 나왔다. 내가 내걸 써서 보내주지 않으면 계속 헤매고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내가 이 프로젝트를 기획했으니 어떤 부분을 중점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적어야 하는지 알지만, 이런 부분들을 설명하기엔 내 영어가 너무나 짧았다. 덕분에 다른 사람들보다 이걸 적는데 좀 더 고생을 했겠지.

20일에 T에게 보내는 걸 목표로 적어내려가던 나의 20대 이야기는 29일이 되어서야 겨우 완성되었다. 완성하자마자 T에게 보내버렸다. 보냈다는 표현보다 보내버렸다는 표현이 더 적절한 듯. 보내고 나니 두 달간 나를 지치게 했던 숙제를 끝낸 느낌이라 너무나도 후련했다. 정말 얼마 만에 후련한 기분으로 출근하는 걸까. 아침 일찍 일어나 적기 시작해서 퇴근하고 와서도 새벽까지 적고 수정하는 작업을 반복했더랬다. 이제 내가 이번 달에 해야 하는 부분은 끝냈다는 해방감에 유난히 들떴더랬다.

T가 내가 보낸 파일을 확인하고선 본인은 아직 쓰는 중이라고 했다. 그러다 파일 양식을 찾아봤는데 찾지 못해서 양식 없이 적어 둔걸 보낸다면서 미안하다 했다. 그리고 받아본 T의 이야기는 생각보다 길고 디테일해서 놀랐다. 사실 T가 그만두고 나서 혹시라도 진행속도가 느려지지 않을까란 생각을 했더랬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했던 내가 너무나 미안해질 정도로 T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더랬다. 이런 프로젝트를 해보지 않은 상태에서, 결과물이란 게 나올 수 있을까란 막연함이 어떤 것인지 잘 안다. 그럼에도 잘 따라와 주고 있는 T에게 고마울 뿐이야.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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