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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관하여

읽기 좋은 책 ::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밝은 방' 후기

by 이 장르 2020.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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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사진에 대한 여러 견해를 접하게 되면서, 사진은 그저 실제에 있는 것을 찍어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닫고 있다. 사실 나도 어쩌면 무의식 중에 알고 있었을 수도 있다.

 

잘 만들어낸다고 생각하는 사진은

유감스럽게도 나로 하여금 항상 어떤 표정을 지니고 있도록 강제한다

 

 

사진은 사진 찍는 자의 감정을 담아낸다. 다시 말하자면, 피사체에 대해 촬영자가 느끼는 감정을 담아낸다는 말이다. 카메라가 느끼는 대로 구도를 조정해 감정을 살려낸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나 스스로 나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은, 평생에 걸친 인간의 비극을 말해주고 있지 않나 싶다. 온전한 나의 모습을 나 스스로가 담아내지 못한다는 것은,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민낯을 마주해야만 하는 운명을 회피할 수 있게끔 해준 신의 배려가 아닐까 싶다.

 

사진은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의 도래이기 때문이다.

 

‘사진작가의 투시력'은 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존재하는 데 있다.

 

 

우리는 대체로 사진을 평면적인 요소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에 눈에 보이는 대로 받아들이곤 한다. 촬영의 주체 또한 입체를 평면으로 인식하고 사진을 찍어내는 경우도 많다.

 

많은 사람들이 본질이 입체적인 물질을 평면 안에 욱여넣으면서도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사진의 소리에 조금 더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끔한다. 사진의 본질은 입체적인 것이다.

 

그렇기에 사진을 볼 때에 우리는, 평면으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다양한 각도로 보려는 시도를 할수록 비로소 사진이 사진다워질 수 있는 것이다.

 

 

스투디움은 나는 좋아한다/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정도의

나른한 욕망, 다양한 관심, 일관성 없는 취미의 매우 방대한 영역이다.

스투디움은 사랑하기가 아니라 좋아하기에 속한다.

그것은 반쯤의 욕망, 반쯤의 의지를 동원한다.

 

보도 사진들은 대게 단일한 사진들이다.

이 이미지들에는 푼크툼이 없다. 충격은 있지만 동요는 없다.

사진은 ’ 외칠 ‘수는 있지만 상처를 줄 수는 없다.

이런 보도 사진들은 수용되지만 그게 전부이다.

나는 그것들을 뒤적여 보지만 다시 기억하지는 않는다.

그것들에서 나의 읽기를 중단시키러 오는 세부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

나는 그것들에 관심 있지만 그것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사진을 통해 생각을 파생시키는 과정에서, 인간은 얼마나 진심인가. 인간과 사진의 타이밍이 서로 맞다면, 사진은 인간을 데리고 생각의 늪으로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사진과의 타이밍을 맞추기 위해서는 다양한 경험과 생각을 해내는 과정이 필수적이며, 수용적 자세도 필요하다.

 

사진을 사진으로만 보지 않아야 비로소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요컨대 사진은 겁을 주고, 격분하게 하며 상처 줄 때가 아니라,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전복적이다.

 

내가 명명할 수 있는 것은 진정으로 나를 찌를 수 없다.

명명할 수 없는 무력감은 동요의 좋은 징후이다.

 

한 장의 사진이 아무리 사실주의적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한 폭의 그림과 본질적으로 구분시켜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 회화주의‘는 사진이 그 자체에 대해 생각하는 그것의 과장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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