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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여운152

영화 :: '붉은 수수밭(红高粱)' 후기 ​ ​ 부모의 선택으로 결정된 나의 운명. 아, 이곳이 나의 끝인 걸까. 사막 한가운데 늙은 나병환자의 병수발을 들어가면서 삶을 마치는 것이 정말 내가 받아들여야 하는 운명일까. 이게 만약 나의 운명이라면 그 운명이란 것이 원망스러울 것만 같다. ​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사막 한가운데로 들어섰을 때 그 절망감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 가마 밖에서 울려 퍼지는 흥겨운 노랫소리에 맞춰 나의 눈물도 뺨을 타고 내려왔다. 당나귀 따위에 감사하며 나를 팔아먹다시피 시집보낸 아버지는 지금쯤 당신의 주둥이에 들어가는 것 외에는 안중에도 없겠지. ​ 불행 중 다행인지 지옥으로 가는 문턱을 막아주는 이가 있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끌렸고, 붉은 수수밭 속으로 사라졌다. 마지막인듯한 했으나 우리는 양조장에서 다시금 .. 2021. 10. 27.
영화 :: '소년 시절의 너(少年的你)' 후기 첸니엔, 나한테 아프냐고 물어본 건 네가 처음이야. ​ 평범한 삶, 내가 원하던 것은 단 한 가지. 하지만 평범이라는 단어가 무색할 정도로 나의 삶은 평범하지 않았다. 당장 눈앞의 욕심을 위해 나를 감아버린 당신들을 원망해야 할까. 당신들을 향해 외쳤던 말은 결국 메아리로 다시 돌아왔다. 다시 떠안아버린 삶의 무게에 나는 무기력해졌다. ​ 그때쯤이었을거다. 불행이 당연하게 나를 잠식할 때 즈음 마주한 너는 역시나 별다를 바 없는 불행인 줄 알았다. 그럼 그렇지, 뭘 기대한 걸까. 그렇게 나는 또다시 도망쳤다. ​ 그렇게 마주한 아침은 여전히 나를 옥죄어왔다. 끝으로 더 끝으로, 더 이상 밀려날 곳이 있나 싶을 정도로 더 멀리, 나락으로. 그렇게 불행의 끝에서 살기 위해 마지막으로 잡아본 것이 너의 손이었.. 2021. 10. 19.
영화 :: '붉은 거북(The Red Turtle)' 후기 ​ ​ ​ 신기했다. 처음 보는 무언가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당신은 나의 궁금증을 깨워내기에 충분했다. 당신도 나를 궁금해할까. ​ 당신의 탈출을 막은 것이 아니다. 단지 당신과 대화를 하고 싶을 뿐이었다. 당신에겐 섬세하게 움직일 수 있는 열 개의 손가락이 있겠지만, 나는 뭉퉁그려진 두 개의 팔뿐이다. 바다로 올라온 당신이 반가웠다. 나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신호를 보냈을 뿐인데. 그렇게 흩어진 당신의 흔적을 타고 당신은 모래밭으로 다시 돌아갔다. ​ 당신의 모래밭은 나에게 너무나 어려워, 나의 바다로 또다시 와주길 기다렸다. 간간이 떠오르던 당신의 공간은 나의 노크 몇 번에 무참히 흩어져 버렸다.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그곳으로. 당신이 있는 그 모래밭으로. ​ 뭉툭한 나의 두 팔로 모래밭.. 2021. 10. 5.
영화 :: '무드 인디고(Mood Indigo)' 후기 우리의 사랑은 어떤 향일까. 그리고 우리는 이 모습 그대로 사랑할 수 있을까. 인생의 한순간에서 우연히 만나 서로에게 빠져, 마치 우리의 사랑을 위해 세상이 존재하듯 그렇게 사랑했다. 우리의 사랑은 나에게 그런 존재였다. 이 순간 영원히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을듯했다. 딱 지금, 이렇게. 하지만 세상은 그리 녹록지 않더라. 우리가 함께하기로 결심했던, 우리가 함께 피워나갈 미래를 그리던 그 순간부터 당신은 시들어갔다. 모든 것이 나 때문일까. 내 욕심에, 내가 당신 곁에 있어서일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당신을 지켜내기 위해 내 모든 것을 내놓는 것뿐. 괜찮아, 당신은 내 전부니까. 그렇게 당신은 떠나갔다. 야속하다기보단 당신과 함께할 수 있던 시간을 조금 더 늘리지 못했다.. 2021. 9. 28.
영화 :: '쉰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 후기 홀로코스트, 과거라는 이름으로 묻어두기엔 그 흔적이 여전히 고통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누군가의 목숨이 한낱 종이 장 보다 하찮게 여겨져 쉽게 짓밟히던 시대를 살아가지 않은 것은 행운이라 할 수 있겠다만, 그렇다면 그 시대를 살아갔던 사람들의 희생은 무엇이 되겠는가. 보상할 수도, 보상받을 수도 없는 시간. 인간이길 포기했던 사람들 속에서 스스로 인간임을 잊지 않았던 몇몇 사람들. 그렇게 자신의 목숨을 걸어 전시해둔 채로 광기만 채 남아있던 시선을 끌어냈다. 그리고선 음지로, 더 음지로, 가능한 한 더 보이지 않는 곳으로. 한 영혼이라도 더 붙잡기 위해 소중히 여겼던 모든 것들을 내놓았다. 고마워하는 마음보다 당신들을 고통으로부터, 최소한의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버텨내는 것이 나의 목표일뿐이다.. 2021. 9. 27.
영화 :: '사랑과 경멸(Contempt)’ 후기 ​ ​ 당신을 사랑했다. 당신만의 언어로 지저귀는 소리에 잠들었고, 설레는 아침을 맞이했다. 당신이 꿈꾸는 모습이 멋있더랬다. 자신만의 신념을 지닌 당신의 모습은 내가 반하기에 충분했다. ​ 당신을 경멸한다. 당신만의 언어로 지껄이는 밤잠을 설쳤고, 지겨운 아침을 맞이했다. 당신의 꿈 타령하는 모습이 한심하더랬다. 자신만의 신념을 고집하던 당신의 모습은 내가 질리기에 충분했다. ​ 예상치 못한 무언가는 우리를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이끌어낸다. 얼마 전까지 사랑을 속삭였던 우리, 영원을 약속했던 우리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당신에게서 벗어나길 바랄 뿐이다. ​ 영원한 것은 존재하긴 할까. 영원할 것을 약속하며 사랑을 속삭이는 이들에게 영원이란 무엇일까. 영원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어느새 빛바랜 채로 .. 2021. 9. 14.
영화 :: '1987(1987:When the Day Comes)' 후기 ​ ​ 그저 평범하길 바랐다. 평범한 채로 살아남길 바랐다. 그 끝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시간을 기다리며, 혹여 숨소리가 들릴까 죽은 듯 살아왔다. 그저 내 주변, 나의 가족들이 다치지 않으니 그걸로 됐다. ​ 우리의 목구멍 속엔 남영동에서 굴러들어온 돌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돌에 막혀 조용히 내뱉던 혼잣말조차 꾸역꾸역 삼켜내야 했다. 바라는 건 오직 하나, 그저 오늘 하루도 그저 무사하길 바랄 뿐이다. ​ 위험에 온몸을 내던져 부딪히는 저들이, 그저 어리석어 보였다. 한낱 촛불 따위로 세상을 밝힐 수 있더라면 고통이란 게 존재하지 않았겠지. 군화에 짓이겨지는 한낱 하루살이처럼 어이없게 삶을 끝내기 위해 그들은 오늘도 거리로 나서고 있었다. ​ 동이 튼 적 없는 이곳의 어둠에 묻혀버린 사람들이 얼마.. 2021. 9. 13.
영화 :: '처음 만나는 자유(Girl, Interrupted)' 후기 ​ ​ 세상은 나에게 어떤 존재인가. 세상의 기준에 의해 정의되고, 규정되어왔다. 결국 나는 세상에 의해 철저히 고립되었다. 당신들만 아니었다면, 내가 이곳에 들어올 일은 없었을 텐데. 부모도 외면한 나를, 누가 지키려 하겠는가. 당신들로부터 나를 지켜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오직 나 자신뿐이다. ​ 감당하기엔 너무나 잔인했던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하늘을 향해 힘없이 디뎠던 발은 결국 그대로 멈춰버렸다. 데이지에게 잔인했던 사람은 누구였나. 회피하려 했던 현실을 되새겨준 리사였나, 아니면 데이지를 지옥 속에 가둬두었던 그녀의 아버지였던가. ​ 다시금 그녀의 흔적을 안고 제자리. 이곳을 나간다고 해서 내가 원하는 것이 없을 수도 있다는 불확실함이 나를 더욱 두렵게 만들었다. 아래로 더 아래로, 당신의 .. 2021. 9. 6.
영화 :: '홀리 모터스(Holy Motors)' 후기 ​ ​ 시간은 누구의 것인가. 당신의 시간은 온전히 당신의 것이라 장담할 수 있는가. ​ 타인을 위한 시간으로 마주했던, 내 과거 시간도 온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있지 못했다. 우리의 추억은 어디로 사라진 것이며, 우린 도대체 언제부터 누군가를 대신하고 있던 걸까. 우리의 삶이란 게 있긴 할까. 아니, 사실 애초에 존재한 적 없었던 걸지도. ​ 어린 시절 우리는 분명 특별함을 배워왔건만, 이유 모를 무언가에 휩쓸려 이곳까지 왔다. 평범함이란 이름 속에 억눌려있던 특별함이란. 누군가를 위한 삶을 살고 있는 지금, 우리가 원하는 삶이 이런 것이었을까. 가끔은 아득한 이 상태가 서글프게 느껴지곤 한다. 사라진 시간,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마주치는 가식적인 시간들. 그리고 그들의 돈과 맞바꾼 나의 아이덴티티. .. 2021. 8. 31.
영화 :: '피아니스트(The Pianist)' 후기 ​ 갑작스러운 폭발 소리가 무뎌질 때 즈음, 내 삶도 함께 무너져내렸다. 평생을 걸쳐 들였던 나의 노력이, 이곳에선 그저 권력에 기생해 목숨을 연명하는 수단으로 전락해버린 지는 오래. 나에게 박수를 보내던 사람들의 손가락이 날카롭게 날아든다. ​ 파란 별을 짓이기는 소리가 이곳저곳 울려 퍼진다. 왼팔에 둘러진 하얀 천은 점점 구겨지고 짓밟힌다. 도랑으로 밀려나버린 우리의 삶은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누구를 원망하랴. 이 모두 인간의 욕심인 것을. 지나가는 벌레보다 못한 존재로 만들어버린 당신들에게 건네받은 것은 무기력뿐이다. ​ 무얼 할 수 있을까. 그저 빵 부스러기 따위에 소중했던 것들이 하나씩 끌려가고 있다. 오랜 기간 쌓여버린 무기력은 덥수룩해져 버린 수염 속 피부처럼 잊힌지 오래다. ​ 살아있긴.. 2021. 8. 24.
영화 :: '악마의 씨(Rosemary's Baby)' 후기 ​ ​ '당신은 틀렸다.' ​ ​ ​ 나를 위한다며 다가오는 모든 것들이 의심되기 시작했다. 호의를 호의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 의심의 근원은 나 자신일까, 주변일까. 아니면 생존을 위한 본능일지도. 사실 단순히 호의일 수도 있다. 나의 모습은 그들의 경험에서 비롯된 기쁨과 연민 등의 감정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뿜어진 그들의 향수일지도 모른다. ​ 그러나 아프다. 분명 그들을 마주하고 난 후로 누군가의 축복을 온전히 만끽하고 있지 못했다. 주위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내가 틀리다 말하고 있다. 가장 믿었던 사람조차도. 그렇다면 정말 나는 틀렸던 걸까. 무언가 잘못되고 있음이 부정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그 누구도 나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 ​ 벗어나.. 2021. 8. 18.
영화 :: '굿바이 레닌(Good Bye, Lenin!)' 후기 ​ ​ 무사히 깨어났지만, 누군가가 평생을 바쳐 그려왔던 이상적인 세상은 이제 그어디에도 없다. 그동안 믿어왔던 것들이 모두 무너졌다. 당연했던 것들이 이제 더 이상 당연한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배척해왔던 모든 것들이 하루아침에 나의 삶으로 흘러들어왔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혼란이라는 경험을 선물했다. 어쩌면 이 혼란은 두려움이며, 그 누구도 인정하고 싶지 않아 오랜기간 외면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결국 모든 순간은 과도기였다. ​ 선의의 거짓말이라 했다. 그렇다면 그 선의는 누구의 시선에서 선의인 것일까. 선택 할 권리조차 주어지지않았던 무지는 과연 당사자를 위한 것일까, 아니면 당사자를 굳이 이해시키고싶지않은 그들의 편의를 위한 것일까. 견고하게 쌓은줄알았던 거짓도 결국 한낱 모래성일 .. 2021. 7. 15.